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May 26. 2024

[연극] 야행성동물



연극 :  야행성동물

공연장소 : 씨어터 쿰

공연기간 : 2024년 5월 24일 ~ 2024년 6월 2일

관람시간 : 2024년 5월 25일 오후 3시




    이 연극을 보고나서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아니, 좋고 나쁘고 까지 포함해서 이 연극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연극만큼은 아무리 좋던 나쁘던 빠짐없이 감상을 남기기로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연극 감상이 가혹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일단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소극장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공을 들인 무대를 보고 조금 놀랐다. 다소 기하학적인 이 무대 디자인이, 그러니까 무대의 위아래를 거꾸로 뒤집어도 유사한 모양이 나오도록 구성된 이 디자인이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을 모두 한 공간 안에서 구현하고 있는 이 연극을 시각적으로 상징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다만 이토록 신경을 많이 쓴 무대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지 못한 점은 다소 의아스러웠다. 그저 그 정도의 용도를 위해 이 정도의 지출을 한다는 건 전혀 가성비가 맞지 않았다. 이 무대 디자인이 연출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이런 의심은 연극 전반에 대한 느낌과도 일맥상통한다. 번역된 책을 읽노라면 가끔 어떤 구절이 본래 원문의 의도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해석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번역자의 무지나 실수 때문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것이 번역된 책의 묘미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책 전체가 극복하기 힘든 의심과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내게는 이 연극이 그랬다. 우선 이 희곡은 (이 연극이 희곡 원문의 의도와 느낌에 충실했다는 가정하에) 상당히 세심하다. 나는 이 작가의 희곡 중에  '맨 끝줄 소년'의 공연을 2019년에 본 적이 있다. 감상평을 남긴 게 있어서 (브런치에 등록하기 전이라 여기에는 없다) 다시 읽어보니 대체로 나쁘지는 않지만 '미적지근'이라는 표현을 쓴 걸로 보아 나와는 잘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맨 끝줄 소년'은 구성이 치밀하고 극적이며 자극적인 논란거리가 흥미를 북돋아준다. 그런데 이 '야행성동물'은 그저 어려울 것이 없이 평탄하게 의심스럽고 혼란하기만 하다. 작가는 대체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작가의 의도가 아니다. 나는 보통 작가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내가 더 궁금한 것은 대체 이 극단이 이 희곡을 왜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부정적으로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질문하는 것이다. 이 희곡은 주제가 뚜렷하지도, 구조가 흥미롭지도, 캐릭터에 개성이 있지도, 부조리가 강조되지도 않는다. 내가 볼 때는 이것은 표현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희곡이고, 사실상 거의 성공할 수 없는 희곡이다. 그런데 왜 이 희곡을 선택했을까?

     이 연극은 이민자 법에 대해 논하고, 차별과 혐오, 기만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사소한, 글로 표현하는 순간 곧바로 과장이 되어버릴 정도로 구차한 사람들의 '상태'(이 단어를 두고 한참을 고심했다)를 보여준다. 그들은 좋으면서도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시시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갈등과 선택, 결말은 있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이 연극의 가치판단은 모호하기만 하다. 어쩌면 이 희곡은 '뉘앙스'가 모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뉘앙스를 잡아내기가 어려웠다. 다시 말하지만 희곡 원작 자체의 뉘앙스가 모호한 것일까, 아니면 이 연극의 뉘앙스가 모호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제작진의 무지와 실수 때문에 뉘앙스가  망가져버린 걸까. 어쩌면 내 감성과 이해력의 부족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이지 잘 모르겠다.

    이 연극에는 4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위 층에 사는 부부인 '위층 남자'와 '위층 여자', 아래층에 사는 부부인 '아래층 남자'와 '아래층 여자'가 그들이다. 이들 네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성격과 배경과 학식 등을 가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전혀 다른 사람이란 없다는 듯) 서로서로 비슷한 입장과 성향과 심리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굳이 그들을 극의 초반부와 후반부로 두 명씩 묶어서 분류하자면, 극의 초반부에 위층 남자와 아래층 남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믿고 있고, 특별해지고자 하는 열망도 있지만, 자신들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진실 또한 분명히 납득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자발적으로 이용당하고, 그러한 폭력적인 (그러나 이런 평범한 감정에 '폭력적'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쓸 필요가 있을까) 친밀함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며, 책임감을 통해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극의 초반부에 위층 여자와 아래층 여자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비참함은 현실적이기보다는 몽상적이어서 '비참'이라고 하기보다는 '불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부분 에서나마 모든 것을 원하고 불완전하나마 그것이 완벽하기를 바라기에 그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바라는 지도 모르면서도 이것만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소위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비참함만큼이나 현실적인 것, 아니, 현실 그 자체이기에 그 무게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극의  후반부에 가서는 그들을 위층 남자와 아래층 여자, 위층 여자와 아래층 남자로 분류할 수 있을 듯하다. 위층 남자와 아래층 여자는 '허영에 찬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드라마틱하거나 도발적이거나 파괴적인 허영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하며 일상적인 허영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 하기에 그들의 현실 역시 과대평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두 세계가 어긋나다가 결국 충돌하게 되면, 더 평범한 말로 자신의 품위가 손상되면,  그들은 그런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버리거나 자기 자신을 조작해야만 한다. 극의  후반부에 위층 여자와 아래층 남자는 '겸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실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자신의 세계 이외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 삶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다. 어디로 떠나든지 삶은 그들을 따라잡을 것이기에 삶을 이기려 들기보다는 삶에게 져주는 편이 현명하다. 그러면 삶은 너그러워질 것이고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물들을 작위적으로 분류하다 보니 글이 유치 찬란해지고 말았다. 저 부분을 통째로 지워버릴까 하다가 그럼 너무 쓸 말이 없어서 그냥 두기로 한다.  하여간 내친김에 결론까지 말해버리면, 위기를 맞았던 위층 부부는 화해하고, 사랑이 깊었던 아래층 부부는 헤어진다. 아래층 여자는 떠나고 아래층 남자는 위층 부부 곁에 남는다. 결국 그들 각각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몫이었고 그들의 결말은 그렇게 서로 달라졌다. 그래서 뭐가 어찌된 것이냐고? 나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지금 내가 뭘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글이 이렇게 길어지다니 나로서도 좀 당황스럽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히자면, 이것은 그리 좋은 희곡은 아니다. 그리 흥미로운 연극도 아니다. 마치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그 사람 아파트에 사는 위층 부부와 아래층 부부의 시시콜콜한 사연이라도 들은 것처럼, 나는 시큰둥하다. '미적지근'이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다시 한번 더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