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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02. 2024

[연극] 죽은 남자의 휴대폰



연극 :  죽은 남자의 휴대폰

공연장소 : 소극장 산울림

공연기간 : 2024년 5월 31일 ~ 2024년 6월 9일

관람시간 : 2024년 6월 1일 오후 3시



   

     나는 5월 내내 매주 연극을 관람했는데 그 4편의 연극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감상평이 비평보다는 비판에, 비판보다는 독설에 가까워졌다. 내가 칭찬하는 것보다 독설하는 데 더 저항감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독설을 즐기는 (매우 즐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건 결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공들여 최선을 다해 발표한 작품을 공개적으로 깎아내리면, 그것도 4번 연속으로 깎아내리면 개인적으로도 내상을 입는다. 그러나 나는 익명의 관객으로서 어둠 속에서 지극히 안전하고 무료하기에, 오늘도 기운을 내어 독설에 나서야겠다.  

    오늘은 연극 자체보다 희곡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룰 것 같다. 무엇보다 희곡에 대한 내 기대치가 높았던 탓이 크다. 인터파크 안내 페이지에서 이 희곡의 줄거리를 읽었을 때, 아, 이건 재미없을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손에 넣은 죽은 남자의 휴대폰으로 그 남자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감정들, 그 가족들과 지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혹은 위로한답시고) 지어내는 거짓말들과 그로 인한 오해들, 그리고 죽은 자와 자신 사이의 영원한 공백과 그 공백을 허물어뜨리는 교감....뭐 이런 것들을 적당히 나열만 해놓아도 너끈히 중타는 칠 터였다. 그런데 왜 이러실까.

    원작 희곡을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이 연극이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지 알 길이 없다. 일단 이 연극이 원작에 충실하다는 가정하에 말하자면, 이건 정말이지 미숙한 희곡이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굉장히 좋은 소재를 개발해 놓고도 도대체 그것이 왜 좋은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빨간 망토의 소녀가 아픈 할머니에게 줄  빵과 포도주를 손에 쥐고서도 굳이 할머니에게 주겠다면서 으슥한 곳에서 들꽃이나 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무지함이 결국 늑대를 할머니에게 안내하는 앞잡이가 되지 않는가.

     우선 주인공 '진'이 휴대폰을 손에 넣는 과정과 죽은 '고든'에게 애착을 느끼게 되는 동기가 너무나 어설퍼서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마음이 불안 불안했다.  뻔히 보는 앞에서 얼렁뚱땅, 그냥 그렇게 됐다고 치고 넘어갑시다, 하는 식이 아닌가. 그러다가 '진'이 '고든'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기대감을 갖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자신의 의도가 선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그 결과까지 선하다면 더더욱, 자신의 말이 진실이냐 거짓말이냐 따위는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고든'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어떤 전문 사기꾼보다 능수능란하게 고든과 고든의 가족들을 기망했다. 고든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모르면서, 그녀는 고든을 대신해서 고든이 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고든이 느끼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고든이 말하지 않은 말을 하고, 고든이 쓰지 않은 편지를 쓰고, 고든이 주지 않은 선물을 주었다. '고든'의 가족들과 지인들 역시 결코 '고든'답지 않은 그녀의 얘기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거짓으로 유도된 진실한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들에게는 '고든'이 아닌 자신들을 위한, '고든'이 아닌 자신들이 주인공인 해피앤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선한 사기극이 나를 무척이나 즐겁게 했다. 이 사기극은 '고든'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저지른 '진'의 사기극이 아니라, 결국 '고든'에게 저지른 '진'과 가족들의 사기극이었기 때문이다.  뭐, 죽은 자에게는 반론권도 항소권도 없으니 그들은 무죄일까. 아니, 그들의 '고든'이 진짜 '고든'보다 낫기 때문에 오히려 진짜 '고든'이 가짜 '고든'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고든'은 단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왜곡됨으로써 더 철저하게 죽어버린 게 (혹은 죽임을 당한 게) 아닐까. 나는 연극이 진행되면서 이런 문제의식과 갈등이 심도 있게 펼쳐지리라 기대했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벌어지지를 않았다.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어영부영 흘러가는 바람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사랑'이니 '장기밀매'니 '꿈'이니 '지옥'이니 하는 잡다하고 지엽적인 이야기들이 주워 담을 수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찝찝하게 이어지더니 결국 연극은 그대로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분노보다는 허탈감을 느꼈는데 어쩌면 허탈감이 분노보다 사람에게 더 해로운지도 모르겠다. 연극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좋았던 순간이 아예 없었던 아니다. 연극 전체의 의미나 개연성은 차치하고, '고든'이 자신이 죽었던 마지막 날에 대해 독백하는 장면을 나는 인상 깊게 보았다. 그것은 배우의 덕분이었는데, 배우의 연기, 목소리 톤, 대사가 어우러져서 그 부분만 한 번 더 보고싶을 만큼 매력적인 장면이 나왔다. 만약 이 부분마저 없었다면 나는 정말이지 마음 둘 곳 없이 연극과 함께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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