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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16. 2024

[연극] 맥베스



연극 :  맥베스

공연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공연기간 : 2024년 6월 13일 ~ 2024년 6월 16일

관람시간 : 2024년 6월 15일 오후 3시




    이 연극은 재미없다. 내가 시작부터 이렇게 지를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재미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이 연극을 높이 평가할 것 같은 불길한 안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다소 세게 말한다 해도 그들 덕분에 타격감은 그리 크지 않으리라. 어느 정도 재미없었냐 하면, 내가 박하게 평가를 하는 경우에도 공연 중에 나오고 싶은 적은 많지 않은데, 나는 이 연극을 보면서 몇 번이나 뛰쳐나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나는 장애인 배우들의 연극을 좋아한다. 이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지만 딱히 수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전에 장애인 배우들이 출연했던 극단 '애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본 최고의 '고도를 기다리며'였을 뿐만 아니라 내 관객 인생 전체를 통 틀어 가장 인상 깊은 연극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떤 장애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틀거리며 말을 더듬는 고고 (어쩌면 디디였는지도 모르겠다), 휠체어를 탄 왜소한 몸집의 포조 등, 나는 이 배우들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깊이와 가능성을 그 어떤 비장애인 배우들보다 더 잘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희곡의 진부함을 넘어 연극을 한 단계 더 멀리 밀고 나갔으며, 그들이야 말로 인류를 대표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연극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말이다. 역시나  '미학적'이라는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지만 딱히 수정하지는 않겠다. 오래전 서커스에서 괴물쇼를 보며 환호했던 것과 같은 악취미가 아니냐고 나를 비난해도 할 수 없다. 어차피 모든 연극 무대는 괴물쇼가 아닌가. 나는 극단 '애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무대라는 영역이 장애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 다시는 그런 연극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연극에 기대를 많이 했다. 농인 배우들의 수어와 연기가 무대 위에서 어떤 새로운 연극적 경험과 영감으로 구현될지, 세상의 지평을 어느 비정상적인 곳까지 확대할지, 그래서 이 '정상'이라는 협소함 속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비장애인들의 뺨을 어떻게 후려쳐줄지 말이다. 결과는 앞에서도 말했듯 대 실망이었다. 보는 내내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일단 가장 외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면, 대체 이 연극이 왜 '맥베스'라는 간판을 내걸었는지 의문이다. 그것은 단지 이 연극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너무 많이, 거의 형체도 본질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훼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약 이 연극에 다른 제목을 붙였다면 관객은 아예 '맥베스'를 연상조차 하지 못했을 테지만, 뭐 그것은 괜찮다. 문제는 이 연극이  아예 '맥베스'에는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맥베스'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단지 '맥베스'라는 브랜드를 머플러처럼 목에 두르고  명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손쉽게 편승하려 했다는 것이 내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런데 그건 또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명품 옷을 입으면서 명품 브랜드가 마치 자신의 브랜드인 것처럼 과시하는 건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사에서도 흔한 일이다. 문제는, 진짜 문제는, 연기자들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은 연기자들의 예술이라고 나는 늘 믿어왔다. 연기자가 연극의 시작이자 끝이고, 무대이며, 이야기이고, 이야기의 부재이고, 연극 그 자체라고 말이다. 연기자가 무대 위에 서는 순간 이미 연극은 완성되고 우리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연기자들의 존재감이 약한 연극을 나는 처음 보았다. 아니, 오히려 연기자들이 연극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차라리 검은 선글라스에 레이스를 두르고 무대 양쪽에서 창을 하던 소리꾼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 공연을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건 일차적으로 연기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연출의 잘못이다. 도대체 이 연극은 정확하게 뭘 하려고 했던 걸까.

     나는 연기자가 농인이든 아니든 아무 관심이 없다. 단지 무대 위에 어떤 연기자가 섰다면 그 이유와 의미와 효과가 있어야 한다. 이 연극에서도 연기자가 꼭 농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수어야 비농인 연기자가 해도 되는 것이고, 아니면 비농인 연기자가 농인의 역할을 연기해도 되는 것이다. 물론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차피 그 의미를 살리지 못할 거라면 딱히 시도할 필요조차 없다. 시도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나는 그런 관객은 아니다. 그리고 예술 역시 스포츠가 아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그것은 농인 배우들에게도 공정한 대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장애인 배우들의 현실에 대해 뭘 알겠는가? 아예 무대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그 각박함과 비정함, 차별과 불합리함에 대해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 배우들이 이렇게 존재감도, 의미도, 매력도, 성의도 없이 소비되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그저 관객의 인간애에 호소하는 선전용 광고 문구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장애인 배우들은 참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며 내게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이것도 좋다. 좋다고 치자. 내가 볼 때 이 연극의 진짜 문제는 '수어'에 있다. 과연 이 연극이 수어의 연극적 의미와 미학적 활용에 대해 얼마나 깊이 숙고했는지 의문이다. 그냥 대사를 수어로 하자, 이 정도의 발상이란 말인가. 물론 그게 옳지 않은 건 아니다. 잘못이라면 그 이상을 기대한 내 잘못일 테지. 그런데 단순히 대사를 수어로 하는 연극을 비농인인 내가 왜 봐야 하지? 끊임없이 손짓으로 수어를 해야 하는 연기자들의 낯선 산만함과 대사를 자막으로 읽어야 하는 불편까지 참아가면서? 

   연극을 시작하기 10분 전부터, "수어가 제1 언어가 아닌 분들을 위해 한국어 자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안내 목소리가 여러 번 나왔다. 한두 번이 아니라 10번도 넘게 반복되면서 그것은 결국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저 안내의 방점은  '제1 언어'에 찍혀있다. 너희들의 언어는 당연하거나 유일하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야, 누군가에게는 그저 제2, 제3의 언어에 불과할 뿐이지, 농인들이 말을 못 하는 것은 너희가 수어를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아야 해,라는 정상의 상대주의를 비농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주지시키려 한다. 내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은 저 내용이 아니라 저 당연한 말을 일부러 하고, 또 말하고, 계속 말하는 유치함이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모든 관객들이 자리에 앉았을 때 딱 한 번만 얘기했어도 충분히 알아듣고 위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무슨 대단한 계시라도 되는 것처럼 일부러 말하고, 또 말하고, 계속 말하고.... 거기서부터 이미 불길함은 감지되었다. '수어'에 대한 지극히 윤리적이고, 지극히 교육적이며, 지극히 반발적인 접근. 

    어쩌면 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그럼 장애인들이 예술에서도 비장애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옳은 말이다.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내가 말하는 '미학'이란  '비장애인들의 미학'이며 내가 말하는 '관객'이란 '비장애인인 관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책임하고 비겁한지는 모르지만) 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예술과 시장은 결코 평등한 세계가 아니며, 거기서는 평등이 꼭 미덕인 것도 아니라고.  그곳은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의미가 의미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그곳에 평화는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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