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Jul 21. 2024

[연극] 햄릿




연극 :  햄릿

공연장소 : 명동예술극장

공연기간 : 2024년 7월 5일 ~ 2024년 7월 29일

관람시간 : 2024년 7월 21일 오후 3시




    박제는 생명체의 주검을 방부처리하고 생전과 같은 모습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교묘한 기술이다. 한 때 살아있었던 동물 사체의 껍질을 벗기고 살, 뼈, 내장을 모두 빼내버린 뒤 다른 물건으로 속을 가득 채운다. 보통은 솜이나 바짝 마른 대팻밥 등이 충전재로 이용되며 눈구멍에는 유리구슬로 만든 가짜 눈알을 박아 넣는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일리아드나 신곡, 파우스트 같은 고전 작품들을 아동용으로 만든 책들이 있다. 재창작이라고 해야 할지 패러디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런 책들은 목적과 제작 방식이 박제와 유사하다. 외형적인 형태 유지를 위해 원작의 일반적인 감정선과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만 남겨놓고는, 모든 내용을 박박 긁어내어 버리고 대신 아이들 수준으로 유치하게 변형된 알록달록한 대사와 교훈을 안에 가득 채워 넣는다.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불법에 가까운 이런 책들이 책 표지에 커다랗게 제목과 작가 이름이 인쇄된 채 아무렇지 않게 시중에 유통되고 또 아이들에게 권장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어디 가서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말하겠지. 저 일리아드 읽었어요. 재밌었어요.  

    말하자면 이 연극도 그런 것이다. '햄릿'이라는 생명체를 죽여서, 가죽을 벗기고,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정수들을 남김없이 긁어내어 버리고, 그 안을 바짝 마른 값싼 충전제로 가득 채우고, 눈에는 인조 눈알을 박아 넣었다. 인물들 각각의 미묘함과 혼란과 갈등은 사타구니 털까지 왁싱하듯 깨끗하게 싹 밀어버리고,  1차원적인 감정선은 유지하되 맹물을 잔뜩 넣어 말아버리고, 햄릿의 이야기 구조로 뼈대를 만들되 아직 남은 뼈가 수북이 쌓여있는데도 상관하지 않고 가죽을 덮어버린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유명한 몇몇 부분만, 소위 '햄릿'의 시그니처라고 할 만한 ('사는 죽느냐' 같은) 부분만 몇 군데 남겨놓고는 '햄릿'의 대사마저 마치 쓸모없는 땟국물이라도 된다는 듯 빡빡 씻어냈다는 것이다.  지극히  진부하고 뻔한 대사들로 다시 그 빈자리를 꽉꽉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커다랗게 뻥 뚫린 눈구멍에 박아 넣은 '햄릿'이라는 반짝거리는 유리구슬. 

    싸구려 솜과 톳밥으로 가득 찬 주머니를 어떻게 비평할 수 있을까? 더 시간 끌 것 없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개인적으로 '햄릿'을 수없이 봐왔지만 이처럼 천박한 적은 없었다. 신성불가침의 위대한 '햄릿'을 감히 멋대로 편집하고, 정신을 변형시키고, 대사를 삭제하고, 내용을 변경하고, 남자 햄릿을 여자 햄릿으로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의 문학적 살인에 가까울 정도로 '햄릿'을 해체한 작품도 보았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솜과 톳밥으로 채운 주머니에게는 심장도, 생각도, 고통도, 인격도, 진심도 없다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본질 한 톨 없이 오직 형태만 취하고는 손쉽게 그 이름을 계승하려 하는 그 뻔뻔한 모습에 나는 적잖게 비위가 상한 것이다. '햄릿'에 대한 이해도, 존중도, 문제의식도, 분노도, 파괴도 없이, 자신의 재능의 결여를 '햄릿'이라는 유리구슬 뒤로 감추고서, 그저 적당히 상업적으로 포장해서 팔아치우려는 박제 기술자의 만족감. 특별할 것도 없는 물쇼 말고는 건질 게 아무것도 없는 어설픈 소품 수준의 연극이,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마추어 학예회 아동극 같은 수준의 연극이 이 정도 규모의 무대 위에서 이 정도로 많은 관객 앞에 설 수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나는 언제나 연극은 '배우의 연극'이라고 말해 왔고, 웬만하면 배우를 지적하는 일은 삼가는 편인데, 이 연극에서는 그 부분이야 말로 최악이었다고, 최악의 핵심이었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배우들은 전혀 이 연극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햄릿'을, '클로디어스'를, '거트루트'를, '오필리어'를, '폴로니어스'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박제된 햄릿'을,  '박제된 클로디어스'를,  '박제된  거트루트'를, '박제된 오필리어'를, '박제된 폴로니어스'를 연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은 유리처럼 빛나고 있지만 속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이 솜과 톳밥으로 꽉 차있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이 솜과 톳밥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보란 듯이 물속에서 첨벙거리는 그들은 너무 바짝 말라있어서 햄릿을 희화화시킬 능력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 나라는 최악이다'라는 대사가 계속 반복해서 나오던데,  정말이지 내게는 그 나라가 딱 그러했다. (아니, 마지막으로 뒤끝을 부리자면, 대체 이 대사를 왜 그렇게 여러 번 강조하는지, 이게 무슨 대단히 심오하고 도발적이며 결정적인 한 방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한데.)

      살아 숨 쉬는 생명체를, 온 우주에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를 사람들은 구태여 죽여서 그 껍질을 벗기고 값싼 충전제를 채워 넣어 흔하디 흔한 싸구려 박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어리둥절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자신에게 생명체를 창조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사사로운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맥베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