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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07. 2024

실존, 틈새, 연극




(예전에 올렸던 글을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실존'이라는 개념은 낯설지 않다. 오히려 닳고 닳았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이 단어를 여기저기서 손쉽게 접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표현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우리는 실존할 수 있으며 실존해야 한다고, 현대인들은 매 순간마다 각오를 다진다. 그러나 만약 실존이 정신, 의지, 주체성, 선택, 창조의 문제라면,  나는 실존이란 불가능한 일이며 인간은 결코 실존할 수 없다고 말하겠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꿈꾸는 자아 과잉적이고 이상적인 자기 초상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저 초인주의의 좌파식 변종에 불과하다. 실존이란 노력하고 성취해야 하는 자기실현이나, 일부 뛰어난 인간만이 완수할 수 있는 어떤 경지나,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정치적인 존재론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실존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해서 우리가 실존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그것은 그저 정신이 명료하다거나, 의지가 강하다거나, 자신감이 넘친다거나, 컨디션이 좋다거나, 흥이 올랐다 등의 자존감과 자기만족을 표현하기 위한 관용어에 불과하다. 이제 '실존'은 지극히 진부하고 교조적이며 다소 촌스러운 수사학의 영역이 되었다. 

    실존주의는 (기독교와의 단절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잔재 혹은 연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홀로 남겨둔 채 돌연 실종된 야훼 아버지는 결국 (니체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 고귀하고 가혹한 아버지를 잃은 자아과잉의 교만한 어린아이들은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되기보다는 구태여 아버지의 빈자리를 우상으로 꽉꽉 채우려 한다.  '실존'이라는 빛나는 우상. 

     '실존'이란 신의 죽음과 함께 기원부터 해체되어 버린 윤리와 휴머니즘, 이상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재건하고 소시민들의 도덕적 목적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고고한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아마도 자기 자신도 속아 넘어간) '선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들 실존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결코 해낼 수 없는 그러나 동시에 결코 실패할 수도 없는 과제를 주고는 무지개 너머 어딘가로 그들을 영원히 영도하는 과거 사제의 명예와 권력을 계승한다. 그들에 따르면 비록 신과 함께 우리의 근거는 사라졌지만 신과 함께 우리의 근거가 사라졌기에 우리는  (더) 실존하고, (더) 가치 있고, (더) 존중하고, (더) 사랑하고, (더) 연대하고, (더) 주체성과 책임을 가지고,  (더) 자유롭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와, 아름답지만 역겨운 이야기. 

    솔직히 말해서 (신이 없어도, 혹은 신이 없어서, 혹은 에라이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가 과거보다 더, 다른 누구보다 더 존재할 수 있다는 지적 선민의식이야말로 바로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치열하고 처연한 난리법석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언제나 실존하고 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더도 덜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말이다. 내가 말하는 '실존'이란 '생명 의식'이라고 재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인간 의식'과는 대척점에 있다.) 이것은 생명(본질)과 물리(죽음)가 갈라지는, 맞닿아 있는, 연결되는 지점으로써 지능의 문제도 인간만의 문제도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개미보다 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개미보다 더 실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살아있는 자가 이보다 더 살아있을 수 없듯이, 죽어있는 자가 이보다 더 죽어있을 수 없듯이, 실존 역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에 대한 수사적인 담론은 사실 실존과는 아무 상관없으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선언 역시 패기는 있으나 유치할 뿐이다. 실존과 본질은 선후관계나 대립관계나 경쟁관계가 아니다. 정교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실존하고 있는 본질이며 본질적으로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이론적이며, 무엇보다 선동적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초인적인 인간상, 새로운 예수를 창조하고자 하는 예술가-지식인의 종교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야심일 뿐이다. 

     물론 우리의 의식은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실존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실존을 예감으로 희석한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의식은 자신의 실존을 감당하거나 직시할 수 없기에, 감당하거나 직시하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실존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표리부동' 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인간적인 속성이다.) 우리가 실존의 담론을 생산하는 것도 실존하거나, 실존에 접근하거나, 실존을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존을 외면하기 위해서다. 마냥 안심하고 편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실존에 대해 떠드는 동안 우리는 가장 실존을 잊는다. 실존에 대해 떠드는 동안 우리는 가장 실존하지 않는다. 마치 몇 백광년, 몇 천광년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처럼,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무감각한 놀라움과 낯섦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이해한다. 

     실존과 의식은 인력으로 묶여 공전과 자전을 거듭하면서 함께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지만 결코 만날 수는 없는 두 천체의 관계와 비슷하다. 마치 지구와 달처럼 말이다. (어느 쪽이 지구이고 어느 쪽이 달인지는 모르지만.) 이 세계는 지구와 달의 접촉을 방지하는데, 애초에 지구와 달이 접촉하지 않기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실존적으로 의식할 수 없고 의식적으로 실존할 수 없다. 어쩌면 죽음의 순간, 모든 게 궤도에서 벗어나 한 점 속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찰나에야 비로소 실존과 의식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직 소멸할 때에만이 진정 실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실존하기 위해서는, 아니 (우리는 이미 실존하고 있기에)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실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접근해야 한다. 죽음에 접근할 수 없다면 최소한 죽음을 모방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실존 역시 모방할 수 있. 그런데 어떻게 생명이 죽음을 모방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려면 멈출 수 없는 모든 흐름을 멈추고, 벌어지지 않는 틈을 벌려서, 작지만 강력한 진공의 시공간을 잠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현실적인 강제성, 인위성, 예외성이 필요하다. 비록 그 작은 틈이 삶의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인해 곧바로 다시 오그라들어 영원히 사라지고 말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 틈새를 '예술'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미 실존하고 있는 우리가, 그리고 실존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그리고 멀어지기 위해 탄생한 우리가, 다시 자신의 실존에 접근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실존을 예감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죽음 역시 예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실존으로부터 죽음으로, 다시 죽음으로부터 실존으로 도망가며 끝없는 왕복 운동 속에서 진동한다. 물론 우리의 의식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죽음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예감으로 희석한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의식은 자신의 죽음을 감당하거나 직시할 수 없기에, 혹은 감당하거나 직시하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표리부동' 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인간적인 속성이다.) 우리가 죽음의 담론을 생산하는 것도 죽거나, 죽음에 접근하거나, 죽음을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서다. 마냥 안심하고 편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죽음에 대해 떠드는 동안 우리는 가장 죽음을 잊는다. 죽음에 대해 떠드는 동안 우리는 가장 죽지 않는다. 마치 몇 백광년, 몇 천광년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처럼,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무감각한 놀라움과 낯섦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이해한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비유하자면 실존과 죽음은 먼 양 극단이 아니다. 우리는 왕복 운동 속에서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과 죽음이라는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하나의 행성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지럼증을 느끼며 헷갈리고 멍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자신이 공전과 자전의 역학 속에서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고 있으며 틀림없고 완전한 종말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천진함과 무지 속에서 우리는 결핍이 없는 완전함을 꿈꾸며, 자꾸만 흩어지는 자신의 머리와 팔과 다리, 몸통, 뇌, 눈, 혀, 귀, 손가락, 장기들을 끊임없이 쓸어 모아 이리저리 제대로 맞춰보려고 애쓰면서 한평생을 보낸다. 우리 앞에 언제나 놓여있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면 완전한 전체 안에 모든 게 다 제 자리에 제대로 붙어 있는데 어째서 돌아서면 자꾸만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이 흩어지고 흘러내리는 것일까. 어쩌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가짜이고 거짓이고 그림자인 걸까? 그러고 보니 이 거울 뒤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지? 그 때, 마치 이 질문이 '열려라 참깨'라도 되는 듯, 예술이 단단하고 반질반질한 거울에 틈을 벌리고, 거울 위에 비친 단단하고 반질반질한 형상에도 틈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문을 열어준다. 거울의 틀은 문틀이 되고, 액자가 되고, 극장이 된다. 자, 이제 우리는 쭈뼛거리며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예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실존을 전도하는 (의식의) 환상을 다시 전도하는 환상이다. 그리고 소위 최초의 예술가인 신은 인간의 안과 밖을 뒤집은 것처럼 전도된 '세계의식'으로써 그 (의식의) 환상의 메커니즘을 수호하고 조정하고 갱신한다. 우리가 실존하고 있으나 실존을 의식하지 못할 때 신은 실존하지 않으나 실존을 의식한다. 신이 죽고 부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결코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영원히 실존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을 때 실존과 의식이 만나듯, 신이 죽을 때에도 비실존과 의식이 만난다. 그리고 신의 죽음과 부활 그 간극의 찰나에 잠깐 환상이 사라지면서 실존의 진실이 노출된다. 

      신의 '비실존'과 인간의 '실존'은 우리가 얼핏 지례 짐작하는 식의 반대말이 아니다. 신이 인간의 안과 밖의 뒤집어짐이듯이, 신의 '비실존' 역시 '실존'의 내용이 아닌 형식이 전도된 것이다. '실존'이라는 단어를 이미지로 연상할 때에도 의식은 오해를 조장한다. 우리는 '실존'을 '텅 비어있는 곳에 존재하는 어떤 단단한 것'으로 가정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사실 '실존'은 오히려 '단단한 곳에 존재하는 어떤 텅 비어있는 것'에 가깝다. (더 정확히는 아마도 '텅  비어있는 곳에 존재하는 텅 비어있는 것'일 테지만) 실존의 내용은 '죽음-공허'이다. 실존의 형태는 '생명-본질'이다.  

     배우는 인간을 모방하는 자가 아니라 신을 모방하는 자이다. 이것이 연극이 제의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유이며 오늘 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신이 그런 것처럼 배우 역시 실존하지 않으나 실존을 의식한다. 신의 죽음과 부활을 스스로 반복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세계의 비밀을 함구하라는 신의 명령을 위반하면서, 환상으로 환상의 틈을 벌려 실존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 이것이 배우들이 하는 일이다. 그들은 신 대신, 우리 대신, 무대라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우리를 실존으로 산채로 밀어붙인다. 신 역시 같은 일을 했지만 오늘 날의 우리는 단박에 멀리 도망쳐 버리고 만다. 이제는 신이 뒤에서 불러도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신이 아니라 저승에서 돌아온 유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모방품인 배우들의 모방적인 죽음은 결국 희화화이기에, 우리는 등 뒤에서 들리는 웃음 소리에 도망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직 텅 빈 무대만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보라. 아무것도 볼 게 없다는 것을 보라.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 에우리디케는 사라졌다. 연극은 끝났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기보다 침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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