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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14. 2024

[연극] 더 드레서



연극 :  더 드레서

공연장소 : 국립정동극장

공연기간 : 2024년 10월 8일 ~ 2024년 11월 3일

관람시간 : 2023년 10월 13일 오후 2시




   내가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은 연극과 싸우기 위해서다. 연극과 전쟁을 치르려고 가는 것이다. 나는 극장 입구에서부터 소매를 걷어 부치고 고개를 빳빳이 들면서 기세등등하게 입장한다. 아주 그냥 혼구녕을 내주겠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말하건대, 언제나 나는 연극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다. 연극이 내 뺨을 후려쳐주기를 바라며 순순히 뺨을 들이밀곤 한다. 얼이 쏙 빠질 정도로, 소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튕겨나간 허공에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호되게 처맞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연극의 싸대기에 충분히 힘이 실리지 않았을 때, 혹은 그저 뺨을 치는 시늉만 할 때, 그만 나는 화가 폭발하여 연극의 뺨을 (내가 맞기를 바랐던 강도만큼이나 세게) 후려치게 되는 것이다. 내 연극 감상이 다소 사디스트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오히려 욕구불만인 마조히스트의 비애에 가까운 것이다.

    자해하거나 테러하거나, 더 좋은 건 자해하면서 테러하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모욕적이고, 자기부정적이고,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것, 나에게 연극이란 그리고 예술이란 그런 것, 소위 포르노적인 것이다. 일상이라는 연극에서 예술이라는 관객이 돌연 무대 위로 뛰어올라 잔인하게 망쳐버리는 것.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혹은 분노의 침묵으로 진부한 대사를 막아버리고, 정해진 동선을 꼬이게 하고, 신중하게 조정된 조명을 박살내고, 견고한 무대를 무너지게 하고, 거대한 극장을 뒤 흔드는 것. 나는 그런 예술을 좋아한다. 

    자, 그러나 이 연극에서만큼은 그 모든 호전성을 내려놓아도 좋다. 괜찮다.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와 대결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보다 잘난 체 하지 않는다. 보통은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만 가끔은 이런 휴식도 좋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부터 순순한 연극의 기쁨을 잃었나. 어릴 적 극장에 갔을 때 나는 웃음을 참지 않았고 몸을 들썩이며 힘껏 박수를 치곤 했는데. 연극과 나는 서로의 단점을 모른척 해주기 위해, 서로의 결핍을 웃어넘기기 위해, 함께 바보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거기에 있었는데. 이 연극은 내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유치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기 충족적인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 고전적이고, 대중적이고, 영리하고, 재치 있고, 유머와 감동이 있고, 인간미가 넘치고, 서민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연극으로서는 가히 손에 꼽을 만하다.  우리는 이 연극을 보면서는 안심할 수 있다. 이건 포르노가 아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배경인 연극이지만 오히려 이 연극 자체는 전쟁이 아니다. 협조적이고 소통하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연극 무대를 넘어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소위 전위적으로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없앤 연극'이는 표현을 종종 보지만, 이 연극이야 말로 정서적으로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없앤 연극'이라고 할만하다.    

     나는 누구에게나 이 연극을 추천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순수한 선의가 있음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게 꼭 좋은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진부하고 다소 깊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리 묘사나 갈등이 그리 심층적이지 않고, 인물들은 다소 전형적이며, 아기자기한 유머 코드에 비해 전체적인 흐름은 선이 굵고 거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연극이 자신의 목표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연극은 자기가 원한 만큼을 온전히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관객 각자의 취향의 문제, 그리고 선의의 문제이다.   

    배우들 역시 연극 자체만큼이나 안정적이다. 총 5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데 모두가 거침이 없다. 특히 나는 송승환 배우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송승환 배우님에게 전혀 기대가 없었다가 (나쁜 뜻이 아니라 드라마 외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대 이상으로 강한 에너지와 존재감에 놀랐다. 사실 여전히 동안이신 외모가 몰입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캐릭터의 철없고 귀여운 면모로 승화된 부분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노먼'의 오만석 배우님의 연기도 좋았다. 캐릭터 상 존재감이 떨어질 수 있는 노먼에게 세심하고 인간적인 무게감을 더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노먼'이라는 캐릭터 연출(연기가 아니라)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희극적인 색채가 강조된 이 연극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건 노배우가 아니라 오히려 노먼이다. 그는 화려한 무대 뒤에서 명예도 보상도 없이, 인정이나 감사도 받지 못한 채, 소위 극장 계급 사회의 최하층민인 사람이다. 그는 모든 일을 해야 하고 모든 이들에게 굽실거려야 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없이는 연극도 없다. 그는 모두에게 떠받들여지고 사랑받고 모두가 벌벌 떨며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주인공만큼이나 연극에서 중요한 존재다. 그는 뇌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지만 뇌와 심장을 연결하는 핏줄이다. 하지만 비극은 아무도, 관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동료들을 비롯해서 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데 있다. 아무런 보상이 없는 삶, 지나간 시간의 허무함, 알아주지 않는 헌신. 살아도 죽어도 만족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 어릿광대는 그것들을 딸랑이 방울로 만들어 흔들며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

     노먼은 연극의 어릿광대다. 리어왕 곁을 떠나지 않는 어릿광대. 리어왕을 위해 요란한 천둥과 번개를 앞세우고서 장대한 폭풍우가 몰아 칠 때, 리어왕의 옷자락 밑에 감겨 비를 쫄딱 맞으며 리어왕을 부축하고 있는 어릿광대. 처음의 웃음을 주고 마지막의 울음을 주는 존재. 연극은 노먼이 어릿광대 화장을 하는 과정이다. 어릿광대는 마지막에 밑에 눈물을 그려 넣음으로써 화장을 완성한다.  '나의 드레서 노먼에게도 감사를.' 진짜 눈물로 그 화장이 지워질 때까지. 내가 다소 아쉬웠던 건 노먼이 어릿광대 캐릭터에 조금 매몰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이다. 이 점은 말로 표현하기가 좀 애매한데 사실 딱히 흠잡을 곳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 그것은 노배우를 좀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캐릭터에게 일관성과 공감대를 부여하기 위한, 구질구질한 일상을 대변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우라는 자신의 역할에 철저하게 빠져있는 노배우 곁에서, 그러한 맨질맨질한 딸랑이 방울의 표면이 갈라지는 순간들이, 일종의 관객으로서의 눈빛이나 침묵들이, 노먼이 노먼이라는 역할로부터 문득 정신을 차리는 찰나들이 있었다면, 좀 더 깊이 있고 입체적인 노먼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상상해 보았다.  




PS. 포스터가 너무나 마음에 안 든다. 촌스럽고 칙칙하다. 연극 전체의 분위기와 장점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노배우의 고독과 쓸쓸함 보다는 오히려 노배우의 열정과 괴팍함을 유쾌하게 표현하는 편이 더 좋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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