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연극은 내 취향이 아니다. 너무 감상적이다. 끔찍할 정도로 도덕적이고 교훈적이고 시사적이다. 나는 이 연극을 2019년에도 보았다. 이번에 연극을 보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연극이 시작되고 나서야 내가 예전에 보았던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 썼던 감상평을 부분적으로 옮겨보자면 이렇다.
'이 연극은..... 희곡의 완성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넋두리들이 나로 하여금 [신파]라는 레드카드를 품속에서 만지작거리게 만들었다. 슬픈 사연들을 무대 위에 올려보라. 관객들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것은 쉬운 길이다. 개를 죽이거나 어린애를 죽이거나 둘 다 죽이면 될 일이다.... 가장 시사적인 문제를 가장 감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나쁜 예인 듯하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것이 알고 싶다]도 있고 [인간 극장]도 있지 않은가.... 나는 연극에서 언제나 그 이상을 혹은 그 이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
사실 너무 가혹해서 내가 다 놀랄 정도다. 그리고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건대 저런 평가는 상당히 경솔하고 부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5년 전 내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왜 저렇게 말했는지도 알겠다. 확실히 이 연극의 기조는 내 비위를 거스르는 데가 있다. 그러나 2024년의 내가 달라진 건지, 아니면 2024년의 '킬롤로지'가 달라진 건지, 나는 이 연극을 상당히 재미있게 감상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속이 다 뻥 뚫릴 정도로 시원했다. 이만큼 제대로 된 연극을 본 게 대체 얼마만인가. 연극 관람 중에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철철 울고 있었을 때에도, 또 연극이 끝나자마자 나를 뺀 모두가 벌떡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을 때에도, 나는 전혀 속이 꼬이지 않았다.
우선 2019년에는 세명의 주인공 배우들 간의 균형이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연극 전체가 '데이비(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성장했으며 사랑하던 개도 학급 동기에게 죽임을 당하고 결국은 폭력 게임을 즐기던 망나니들에게 고문받다가 살해당한 소년)'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데이비의 아버지 '알란'과 폭력 게임 게발자 '폴'의 존재감이 약해졌기에 더 신파로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 배우들 간의 균형이 잘 잡혔을 뿐만 아니라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연기 대결이 치열했다. 배우들 스스로 미묘한 감정 표현을 통해 어느 정도 신파를 걷어내고 인물들에게 섬세하고 현실적인 생동감을 부여한 것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배우에게 마음껏 집중하면서 연극을 본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배우가 무대의 중심이 되는 연극을 좋아하는 데 (모든 연극이 무대 위에 배우를 올리지만 언제나 배우들이 중심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상당히 내 취향이었던 셈이다.
'킬롤로지'를 다소 시사적으로 요약하자면 '세이브 더 칠드런'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엄중한 결과들과 그 대물림 말이다. 우리 모두가 나약하고 고통받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고, 자신의 나약함과 고통에 우리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며, 세상 모든 일의 기원과 원인은 언제나 묘연하고,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같이 정당하고 고유한 사정과 이유가 있지만, 결국 그것을 대면할 때의 우리의 관점과 의지,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실망이 더 큰 실망을, 고통이 더 큰 고통을, 슬픔이 더 큰 슬픔을, 분노가 더 큰 분노를,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만들어 낸다. 가차 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이러한 연쇄반응 속에서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으며 결국 모든 게 자기 자신에게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되돌아온다. 때때로 그 결과가 우리의 선택에 비해 너무나 가혹하고, 특히 중요한 것일수록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을 언제나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일 것이다. 나는 결코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나는 그저 조금 편해지고 싶고 조금 비겁했던 것뿐인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좀 더 용기를 내봤을 텐데.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면. 딱 한 번만 더. 이것이 우리의 한 없는 절망과 분노의 원천이다.
최선과 최악의 운명 사이에는 분명 우리 자신의 역할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걸 바꿀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비참하게 죽을 때, 혹은 누군가가 기적처럼 구원받을 때, 우리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이것은 그리 신선한 발상은 아니다. 당장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우리가 악착같이 플라스틱 생수병을 분리수거할 때에도 이미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의 작은 선택이 세상을 멸망하게 할 수도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다는 생각, 우리에게는 모든 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 우리가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노력해야만 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식상하다면 식상한, 그만큼 이론의 여지가 없는, 그래서 때로는 버겁고 우울한 이런 훈계를 (다행히도) 이 연극은 스스로 꼬집기도 한다. 선하디 선한 의도가 그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상처와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폴'이라는 복합적인 인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토록 선하고 훌륭한 아버지 곁에서 왜 폴은 한없이 외롭고 고통스러웠던가? 왜 불행한 아이들이 계속해서 태어나는가? 과연 이 세상 어딘가에 '행복한 아이'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할까.
그리하여 문제는 단순히 선한 마음, 고뇌와 책임, 심지어 관심과 사랑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저 시소게임처럼 제 자리에서 오르고 내려갈 뿐, 결국 나, 우리, 이 세계의 고통과 실패와 폭력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랬다면 저랬을 텐데 같은 가정과 후회는 달콤하지만 유치할 뿐이다. 너는 결코 다른 네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사람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 세계 역시 결코 다른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세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삶은 없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다른 나는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은 되돌릴 수 없이 지나갈 뿐, 태어난 자는 죽고, 죽은 자는 살아나지 않고, 나는 홀로 죽어간다. 그러고 나면 다 끝이다. 이 유일한 결말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비겁하지만)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고통과 폭력은 전에 없던 새로운 얼굴과 형태와 전략으로 계속해서 우리의 목을 조르지만 어쨌든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진다. 어차피 나는 글렀지만 우리의 다음 세대, 어쩌면 그 다음 다음 세대는 나보다 더 나아질 거라고, 어쩌면 언젠가는 행복한 아이들이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행복한 개들도.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 나는 모든 일에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 역겹지만 이 모두가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