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길 외딴 마을에서 자동차가 고장 난 트랍스는 한 전직 판사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판사는 그를 자신의 사교 클럽에 초대하는데, 그것은 나이가 지긋해진 전직 판사, 전직 검사, 전직 변호사, 전직 사형 집행인이 초대 손님을 피고인으로 가정하고 진행하는 모의재판이다. 초대 손님인 피고인은 어떤 범죄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실제 자기 자신으로 참여해야 한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으며 자수성가한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던 트랍스는 흔쾌히 그 초대에 응하고, '만찬'과 '재판'이 어느 나라에서는 (독일이라고 했던가) 같은 단어로 불린다는 연관 관계 속에서 만찬과 재판이 같이 진행된다. 아마도 그것은 '훌륭하게 요리된 무언가를 뜯고 맛보고 음미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만찬과 재판이 모두 감별사이자 미식가들의 무대라는 의미에서 그 유사성이 있을 것이다. 마치 늙고 음흉한 까마귀들처럼 부풀어 오른 검은 의복을 입고 재판-만찬장에 입장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 사형 집행인과, 젊고 활기차고 야망이 넘치며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는 피고, 그들 앞에 차려진 최고급 음식과 와인들, 그 음식과 와인을 준비하는 미스터리한 가사 도우미.... 나는 가슴이 뛰었다. 아, 드디어 오랜만에 볼만한 연극을 만났구나. 희극, 부조리극, 광대극, 미스터리극, 심리극, 풍자극, 원맨쇼, 잔혹극, 셰익스피어 식의 비극, 뭐 하여간 그게 뭐든지 간에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였다. 도대체 이것이 재미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나는 조금 얼이 빠진 채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만찬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 원인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앞전에 보았던 연극 '이방인'과 같은 문제였다. 소설의 연극화 말이다. 두 연극 다 소설을 연극으로 재창작한 작품이다. 그래도 '이방인'은 1인칭 소설을 독백으로 풀어내면서 그럭저럭 연극성을 해결했지만, '트랩'은 연극적으로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 한편으로는 놀랍지 않은 일이다.
혹여 천재적인 소설가의 소설이라고 해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을 연극화시키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희곡 작가가 필요하다. 소설 속 문장을 냅다 희곡 대사로 옮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소설과 희곡은 서로가 완전히 다른 언어이며, 다른 세계이고, 다른 호흡과 리듬과 온도와 접근과 존재방식을 가진다. 다소 과장하자면 소설이 들숨이라면 희곡은 날숨이다. 그래서 좋은 소설가가 꼭 좋은 희곡 작가인 건 아니며, 또한 좋은 희곡 작가가 꼭 좋은 소설가는 아닌 것이다. 이 연극은 그런 점에서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토록 훌륭한 재료로 차려진 만찬의 음식에 소금도 설탕도 쓰지 않은 격인데 소금을 써야 할지 설탕을 써야 할지 전혀 짐작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열린 해석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버무리는 것은 (관객들이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하기를 바라겠지만) 극명한 차이가 있는데, 이 연극은 단연코 후자 쪽이다.
이 연극에는 두 가지 포인트, 그러니까 저절로 반전 효과를 불러일으킬 정도록 결정적인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노인들의 정체와 트랍스의 자살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이 두 가지 포인트를 모두 다 놓치고 있다. 이 둘을 양손에 들고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형국이다.
첫째로, 이 4명의 노인들은 한 때는 잘 나갔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그저 시시하고 영락한 시골 한량들이지만, 막상 재판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집요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트랍스의 죄를 낱낱이 밝혀내는 사회 정의와 양심의 화신들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괴기한 의상과 집요하고 괴팍한 캐릭터, 예언과도 같은 불길한 통찰력, 그리고 희한하게 침착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 전체 만찬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미스터리한 가사도우미로 인해 그저 소일거리를 찾는 시골 노인들 이상의 어떤 사악하고 신비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이 연극은 그중 한 가지에 집중하기보다는 두 가지 모두를 집적거리면서 가장 흥미롭지만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한 셈인데, 그리하여 가장 크게 망쳐버린 것이다. 결국 치밀하게 전게 되어야 할 트랍스에 대한 심문은 산만함으로 엉성해지고, 노인들과 트랍스 간의 미묘한 심리 게임은 괴팍함으로 얼렁뚱땅 뭉개진다. 그렇다고 이 노인들에게 셜록홈스 같은 재치와 기발함, 지옥의 재판장 같은 섬뜩한 엄중함, 멕베스의 마녀들과 같은 운명적인 신성함,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부숴버리며 낄낄 대는 어릿광대 악마의 천진함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만 싱겁게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만다. 차라리 하나에 집중해서 치열하게 파고들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두 번째 포인트는 트랍스의 자살이다. 사실 이 연극이 실패한 것은 노인들보다도 트랍스라는 인물을 인간적이고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랍스라는 인물을 인간적이고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실패한 것은 트랍스의 자살에 적절한 의미와 설득력을 부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트랍스의 자살은 자연스러운 귀결이 될 수도 있고 놀라운 반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에 따라 이야기 전체의 성격과 전개와 의미와 분위기가 달라진다. 결말이 연극 전체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인물의 본질과 발단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어느 쪽이 되었든 '반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든 충격적인 반전이든 간에 트랍스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내적 접근과 섬세한 표현력이 필요한 건 물론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트랍스에 대해서 무책임할 정도로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 이 연극은 마치 이 연극의 주인공이자 피고인이자 범죄자이자 자살자이자 자신에 대한 검사, 변호사, 사형집행자인 트랍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 마디로 트랍스는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방치되어 있다. 트랍스의 자살이라는 커다란 산을 중심에 두고 연극 전체가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진 것이다. 트랍스는 과연 누구인가? 어떤 꿈을 좇고 어떤 악몽을 꾸는가? 과연 그의 죄가 사형을 언도받을 정도로 큰 잘못이었나? 트랍스가 자살한 것은 죄의식 때문이었나, 아니면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모든 게 시시해졌기 때문일까. 이것은 내가 제기한 질문이지 이 연극이 제기한 질문은 아니다.
이 연극은 트랍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내면도, 내용도, 의미도, 개성도, 의지도 없이 사건들은 그저 얼렁뚱땅 스치고 지나가고, 희곡도, 연출도, 연기도 없이 연극은 (여러 가지 의미로) 다소 충격적인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만약 이 연극에 흥미를 느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원작 소설 자체의 재치 있는 설정 때문일 뿐, 이 연극이 보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이라는 번듯한 식탁에 차려진 이 만찬에는 빈 접시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