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Aug 26. 2024

[연극] 이방인





연극 :  이방인

공연장소 : 소극장 산울림

공연기간 : 2024년 8월 23일 ~ 2024년 9월 22일

관람시간 : 2024년 8월 25일 오후 3시




     셰익스피어나 이오네스코 같이 희곡 자체가 뛰어나고 해석과 표현의 여지가 많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나는 한 번 본 연극은 다시 보지 않는다. 거기다 제작자와 출연진까지 같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미 한 번 본 연극에 비용을 들인다는 게 아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고, 또 달라진 게 없으니 신선함이 떨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6년 전에 보았던 '이방인'을 다시 보았다. 그때는 '브런치'를 하기 전이라 여기에는 감상평이 없지만 내 예전 블로그에는 '나는 카뮈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감상이 아직 남아있다. 이 연극을 다시 본 이유는 요즘에 워낙 볼만한 연극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커튼콜에서 기꺼이 박수를 쳐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행동이 요 몇 달 동안 내내 연극을 보면서도 내가 도저히 하지 못했던 일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무조건 남을 갈구기만 하는 인간은 아니라는 걸 내심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연극에 열광하지는 않았지만 연극을 보는 내내 즐거웠고 끝나고 나서는 힘차게 박수를 칠 수 있었기에 만족스럽다. 이 연극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연극 무대로 옮긴 것이다. 기존의 소설을 그대로 희곡으로 옮기다 보니 이야기가 느슨하게 늘어지고, 희곡적 상상력과 짜임새가 떨어지고, 사건 진행과 등장인물들이 횡적으로 나열되는 아쉬움이 있다. 말하자면 원작에 대한 존중이 너무 지나쳐서 연극이 연극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다. 극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 연극의 장점이긴 하지만 동시에 단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재판 마지막에 "할 말 없습니다"라는 대사를 끝으로 연극이 마무리되었다면 더 좋았을 듯싶다. 재판 후에 감옥에서 다소 지루하게 이어지는 에피소드들과 대사들은 어떻게든 재판 전으로 옮기고서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주인공인 뫼르소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입체적인 인간미와 생기가 떨어지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자신 안으로 침잠하는 실존주의적 1인칭 시점인 소설에 충실하다 보니 뫼르소에 비해 다른 인물들은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들을 평면적이고 피상적인 인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배우의 존재감 마저 무력해질 지경이니 그것은 문학적 의도이지 연극적 의도는 아니다. 소설의 1인칭 시점과 연극의 3인칭 시점을 어떻게 재조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감옥에서 뫼르소와 신부의 대화 장면인데, 연극 전체로 볼 때 가장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이 부분이 상당히 애매하게 처리된다는 느낌을 처음 관람할 때도 받았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에서 모든 걸 쏟아내든지 아니면 침묵하든지 노선을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주인공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는데 딱히 잡히는 인상이나 내용이나 감정이 없어서 싸다 만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남는다. 다음에 또 이 연극이 무대에 오를 때에는 연극 '이방인'이 소설 '이방인'을 죽이는 오이디푸스적인 폐륜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연극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주인공 뫼르소의 대사로 시작한다. 1인극에 가까울 정도로 뫼르소는 연극 내내  관객을 향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얘기한다. 그는 숨기는 것도 없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수다스러운 그에게서 사실상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그가 양로원으로부터 받은 한 장의 전보와 같다. "모친 사망" 그것은 아무 뜻도 없는 말이다. 

     대체 뫼르소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자체가 불분명하다. 그것은 사실상 혼잣말이며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그것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는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말하자면 뫼르소에게는 '말'은 있지만 '목소리'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의견이 없다는 정도를 넘어선다. 그는 할 말이 없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말에 힘이 실릴만한 지위나 역할이 없다. 가령 엄마를 사랑했느냐는 사람들의 간단한 질문에조차 그는 답을 하지 못한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다고 엄마를 사랑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이 엄마를 사랑했는지 사랑하지 않았는지에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엄마를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엄마를 사랑했어도 자신은 자신이고 엄마는 엄마일 뿐이다.  엄마를 사랑했어도 그는 엄마를 양로원에 보내야만 했다. 엄마를 사랑했어도 엄마는 홀로 죽어야만 했다. 그가 여기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는 모든 일들이 이와 같다. 그는 이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무관심하고 무기력한 타인, 이방인이다. 

    그러나 (혹은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인간이기에, 살아 있기에, 실존하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한다. 목소리가 없는 그에게 '총'은 목소리의 완벽한 대용물이다. 의미도, 내용도, 목적이 없이도 마음껏 내지를 수 있는 커다란 목소리. 그 누구의 목소리보다 강해서 상대방이 듣지 않으래야 듣지 않을 수 없는 결정적 소통 방식. 그는 자신의 친구를 괴롭히는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첫 발에 이미 상대방은 죽었는데도 그는 그를 향해 네발의 총을 더 쏜다. 그는 아마도 그 이유를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독한 햇빛의 침묵 때문이었다고. 

     그의 '목소리'는 연극 전체에 세 가지 반향을 일으킨다. 첫 째는 개인적, 둘 째는 사회적, 세 째는 종교적이다. 그것은 평온한 휴양지에까지 쫓아와 자신의 비천하지만 다정한, 그리고 유일한 친구를 위협하던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자가 먼저 칼을 빼들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는데) 범죄자의 부당함을 향한 목소리이다. 또한 그것은 촘촘하고 냉혹한 법과 제도의 감옥 속에 자신을 방치해 놓은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자가 또 다른 이방인-이민자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 사회를 향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절대적인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죽게 하는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자가 아랍인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는데) 귀머거리 신을 향한 목소리이다. 그가 쏜 목소리-총알은 아랍인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 진짜 표적인 그들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언제나 침묵해 온 그가 언제나 침묵해 온 그들에게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대답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새삼스레 질문을 할 필요조차 없다. 자기 자신이 바로 질문이니까. 그리고 드디어 그는 사람의, 사회의, 종교의 법정에서, 자기 자신의 실존의 법정에서 그 질문의 대답을 듣는다.  "사형" 

      태어나지 않았어도 아무 상관없는, 살아가도 살아가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는, 죽어도 아무 상관없는 한 인간이 실존하려 할 때 그는 위대해지거나 범죄자가 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둘의 부조리한 차이를 강조하지만 실은 그 둘의 부조리한 동질성에 더 주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뫼르소는 평생 유일하게 단 한 번 목소리를 냈고 그 대답을 들었다. 영원히 침묵하라.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죽음의 공명. 누군가 묻는다.  "더 할 말이 있습니까?" 그는 대답한다. "없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알바의집, 배로나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