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좀 적적하네요.”
여자는 침묵이라도 깰 심산인지 바싹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그렇죠.”
그는 장미 가시를 훑어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비오는 날에는 기분이 울적해지는지 아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현태는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말을 걸려고 운을 땐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글쎄요. 기압이 낮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 공기 중에 음이온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요. 그리고 아무래도 햇빛이 부족하니까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겠죠.”
그는 주섬주섬 아무 대답이나 늘어놓았다. 그녀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 나온 교수 말로는 빗소리가, 우리가 자궁에 있을 때 들었던 엄마의 혈액이 지나가는 소리와 비슷해서 향수병이 나는 거래요.”
“그래요?”
"정말일까요?”
“글쎄요.”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멀뚱히 미소를 지었다. 혼자 있을 때 종종 그런 것처럼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멍청해 지는 순간이었다. 현태는 재빨리 꽃을 포장해서 여자에게 건넸다. 그녀는 주섬주섬 돈을 치루더니 공손히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혹시, 제가 수업 때문에 매주 꽃이 필요한데요, 차가 없어서 꽃시장에 가기가 쉽지 않거든요. 여기 1주일에 한 번 정도씩 꽃이 들어오죠? 혹시 사장님 꽃 주문하실 때 제가 필요한 꽃도 같이 주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금액은 소매가로 지불할께요.”
현태는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눈매에 가느다란 입술, 빈약한 턱 선,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예쁘게 생겼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얼굴과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희미하고 가느다란 윤곽선이 섬세해 보이는 여자였다. 다만 얼굴 한가운데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코가 그런 느낌을 뭉개버리고 있었다.
“아, 예, 전 괜찮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정말요? 고맙습니다. 큰 걱정 하나 덜었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럼 혹시 다음 주에 필요한 꽃이 있으세요?”
“아직 수강생이 두 명 밖에 없으니까 일단 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꽃 중에서 골라도 될 것 같아요. 나중에 수강생이 더 늘면 그 때 필요한 꽃을 말씀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여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꽃다발 뭉치와 우산을 버겁게 품에 안고 가게를 나섰다. 현태는 문이 닫히자마자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빗속으로 종종걸음 치더니 곧 파란 비누거품처럼 씻기듯이 사라졌다. 현태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유리 건물들로 가로막힌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아직도 끊임없이 비가 뿌려지고 있었다. 그녀 말대로 비오는 날의 우울은 일종의 향수병인 걸까?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자궁에 대한 향수는 아닐 거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유리창 안에 유리창 안에 또 유리창이 있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그 후 꽃집은 저녁때까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저녁으로 싸온 도시락을 먹어 치운 뒤, 그냥 그대로 7시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빗소리와 습기가 사방에 가득했고 해가 지고 나니 더욱 몽롱해졌다. 이런 날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게 상책이었다.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핸드폰 액정에는 ‘경’이라고 적혀있었다.
“여보세요.”
“오빠, 나에요. 뭐하고 있어요?”
“뭐하긴. 가게지. 그런데 왜?”
“어머, 잊었어요? 오늘 만나기로 했잖아요.”
그는 아차 싶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알고 있었어.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아니면 지금 바로 만날까?”
“지금요? 난 괜찮지만 오빠한테는 너무 이르지 않아요?”
“어차피 비오는 날은 장사도 안 돼. 여기 정리하고 갈 테니까 모텔로 가있어. 방 번호 문자로 보내 주고.”
“네, 알았어요. 그럼 이따 봐요.”
그는 핸드폰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팔을 뒤로 뻗으며 몸을 풀다가 혼자서 퍼뜩 웃음이 터졌다. 경애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오늘 하루가 그토록 지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리를 마치고 막 가게를 나서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확인해 보니 [407]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펴지도 않고 한 달음에 차로 뛰어갔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는 모텔로 차를 몰았다.
빗물을 씻어내는 와이퍼 너머에 집중하기 위해 미간을 찡그리면서 현태는 경애를 따로 만나는 게 얼마만인지 세아려 보았다. 어느새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록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다. 딱히 내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 아니라 이놈의 육체가 멋대로 바짝 몸이 달은 것이다, 라고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이나 식사처럼 이것 역시 살아가면서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번거롭고도 수고로운 일 중 하나였다. 만일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섹스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인간은 그때서야 제법 품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엇에나 떳떳하고 진지한 인생 말이다. 하지만 매일 공사가 다망하고 생리가 번잡한 인간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 이상의 굴욕을 끊임없이 감수하고 처리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운이 좋다면 약간이나마 보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굴욕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