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라미 Oct 31. 2024

단어를 꼭, 정확하게 써야 할까?

국어 단어 파헤치기

  '눅진하게'라는 단어를 만났다. '일에 지쳐 피곤한 몸을 눅진하게 해줬던 찜질방과 목욕탕도'라는 맥락이다. 책을 읽다 멈추고 '눅진하게'에 동그라미를 친다.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빠져 드는 읽을거리에서는 왜, 늘, 모르는 단어를 만날까?


  직업으로 15년여, 국어사전을 수천 번은 검색했지 싶다. 문화재 안내문, 교과서, 판결문, 보도 자료 등 공공언어를 감수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십 번씩 국어사전을 찾아서 단어의 뜻과 쓰임을 확인해야 한다. 더해서 책 읽기를 즐거워해 독서량도 적지는 않다. 그런데도 여전히 모르는 단어가 불쑥불쑥 나온다. 당황스럽다.


  실제로 개인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3,000~5,000 사이로 추정한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이나 국어 교육 등 교육 분야 연구 결과이다. 한국어 능력 시험(TOPIK)에서는 고급 수준의 한국어를 6,000~7,000개의 단어를 기반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즉 이 정도 단어면 일상생활뿐 아니라 업무나 학술적인 상황에서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더 나아가 전문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의 경우 특정 전문 분야의 단어를 포함해 일상에서 10,000 단어 이상을 사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에서 발간된 표준국어대사전의 등재 단어는 약 50만 개다. 일상적인 단어뿐 아니라 고유어, 외래어, 방언과 옛말까지 포함된 수이기 때문에 일상적 사용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굳이 단어의 수를 세세히 늘어놓은 이유는 단어가 이만큼 폭이 넓고 깊이가 있는 영역이라는 걸 꼬집고 싶어서였다. 블로그에 재미를 붙이면서 단어의 한계에 직면하여 글쓰기에서 답답함을 토로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각을 문장으로 써 내려가면서 이 단어가 과연 최선인지, 아니 최선 운운은 지나치고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고민하곤 한다.


  단어는 국어학에서 '뜻을 가진 최소 단위'로 정의된다. 풀어 보면 단어는 의미를 담아내는 가장 작은 그릇이다. 글을 쓰는 사람 누구나가 잘 다루어야 할 기초 도구이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각자가 학업과 경험으로 쌓은 단어를 펼쳐놓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단어 사용에서 기초 중의 기초는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즉 정확성이다. 단어의 정확성 하면 플로베르(Flauvert, Gustave; 프랑스의 소설가)가 떠오른다. '일물일어설(le mot juste; the right word)'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어떤 대상이든 단 하나의 정확한 단어를 찾아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가장 적확한 단어를 찾으려는 그의 열망이 느껴진다.


  윤동주 시인이 그의 시 "또 다른 고향"에서 '풍화 작용'(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백골을 들여다보며/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이라는 표현을 놓고 시어답지 못하다고 불만스러워하며 고민하다가 끝내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그대로 두고는 내내 불편해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시어를 탐구하는 시인의 고군분투가 치열함을 넘어 존경스럽다.


  단어는 정확하게 쓰여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비록 소설가나 시인은 아니더라도, 단어를 정확하게 쓰려고 애써야 한다. '눅진하다'는 단어로 돌아가보자. 국어사전(우리말샘, https://opendict.korean.go.kr/main)을 찾아보면 다음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된다.


「001」물기가 약간 있어 눅눅하면서 끈끈하다.

「002」성질이 부드러우면서 끈기가 있다.


  이 단어를 정덕현,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의 작가의 말에서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들어와 8년간 함께 지내다 먼저 떠난 강아지도, 글이 써지지 않아 매일 같이 걸었던 창릉천도, 일에 지쳐 피곤한 몸을 눅진하게 해줬던 찜질방과 목욕탕도, 현실의 불을 잠깐 끄고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줬던 영화와 연극, 뮤지컬 모두 나를 지탱한 뒷것들이었다."(10-11쪽)


  국어사전 1번 뜻, '물기가 약간 있어 눅눅하면서도 끈끈하다'에 딱 들어맞는다. 드라마 리뷰를 쓰는 작가로 글을 쓰는 일상에서 지치고 피곤한 몸을 '상쾌하게' 또는 '풀리게'와는 또 다른 절묘한 뜻을 담은 '눅진하다' 덕분에 나는 이 문장에 머물렀고 음미했다. 글을 읽는 즐거움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이만교, "생각을 문장으로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실전편"을 읽을 때이다.


  "무엇보다 점화는 은미하게 작동한다. 자신도 의식적으로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장면-가령, 앞줄에 선 미인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얼핏 본 순간, 차를 주문하려다 커피를 주문하는 결정을 내릴지 모른다."(25쪽)


  읽으면서 '은미하게'에 동그라미를 쳤다. 직업적 습관이 튀어나와 어느새 '은밀하게'로 고쳐 적었다. 책 초반에 오타를 만나면 신뢰에 살짝 금이 간다. 책을 읽다 보니 이 단어가 다시 나온다.


  "점화는 은미하지만 습관은 가시적이다."(42쪽)


  그제야 사전을 검색한다. '은미하다'는 이런 뜻이다.

 

「001」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다.

「002」묻히거나 작아서 알기 어렵다.


  반면, '은밀하다'는 '숨어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다'는 뜻이다. 틀렸다. 저자가 말하는 '점화'는 '숨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은밀하다'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고, 묻히거나 작아서 알기 어렵다'는 '은미하다'와 만났을 때 뜻이 정확하고 농밀하다. 이 책의 저자에게 감탄한다.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일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지금은 초보 혹은 예비를 앞에 붙이고 있더라도 꿈은 원대해 언젠가는 이들을 떼어내고 단어를 능란하게 쓰는 '작가'이길 꿈꾼다면 단어를 꼭, 정확하게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 탐구해야 한다.


  학문과 직업으로 단어를 고찰해 온 지식과 예비 작가로 단어를 탐구하고픈 열망을 더해 국어 단어의 이모저모 파헤치기를 시작한다. 국어 단어의 언어학적 특성, 문법적 구성, 규범적 측면, 글의 최소 의미 단위로서 단어의 확장, 단어에 내재된 사회적 편견까지, 이 여정이 어딘가 한 사람에게 닿아 단어에 대한 호기심의 문을 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