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 <톰보이>
여름의 햇살과 바람이 로레의 뒷머리칼을 가볍게 쓸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짧은 머리에 꾸밈 없는 옷차림, 운전에 관심을 가지는 등 소위 '남성적'인 속성들은 다 갖추곤 로레가 등장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후 감사하게도 셀린 시아마의 성장 3부작이 모두 한국에서 개봉을 했고, 극장에서 하나씩 관람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톰보이>는 특히 마음이 가는 영화였다. 이사를 온 로레의 집, 베란다에서 보는 초록의 풍경, 물에 뛰어드는 아이들이 나타내는 여름의 이미지와 그 싱그러움이 화면 속 가득 담겨 있는 것도 좋았고, 기본적으로 음악을 잘 사용하지 않는 셀린 시아마의 영화 속, 리사와 로레가 춤을 추던 장면도 좋아 한동안 그 음악을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우리들>, <우리집>처럼 어린 아이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세계를 담아낸 작품들을 원래 좋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화면 속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굉장히 폭력적이고 보기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애초에 아닌 어떠한 경계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지켜내려는 로레의 유약하되 강인한 모습이 계속 마음 속에 맴돌아서, 유독 마음이 가는 영화가 된 것 같다.
사회가 강요하는 규범을 문제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의 간극은 컬러 차트 속 핑크와 파랑의 거리만큼이나 크다. 파란색 옷을 입은 로레가 핑크와 붉은 계열로 도배된 잔의 방에 들어가는 순간에서부터 그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인형을 좋아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잔은 귀여운 딸이자 여동생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반면, 로레는 그런 잔을 보며 가만히 미소지을 뿐이다. <톰보이>에서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어리다. 머리 길이나, 옷차림이 아니면 구분도 잘 가지 않는 어린 아이들. 성별 구분이 더 안 가서일까, 사회는 더 기를 쓰고 성별을 표시하려 한다. 신생아임에도 남아로 오해 받기 싫다고 아기에게 핑크색 내복을 입히고, 리본을 붙여준다. 마트의 여아와 남아 장난감 코너는 색부터 놀이 종류까지 확연히 다르다. 그런 사회에서 대부분의 여자 아이는 공주를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디폴트값을 정해둔 사회는 무시하고 원래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은 취향이 다르다고 말한다. 여성은 여성으로 길러진다. 의복이나 취미의 문제든, 근본적인 성 정체성의 문제든, 여성으로 길러지기를 거부하는 행위 자체는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이 어떤 세상을 구성하고 어떻게 자랄 수 있는지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본격적인 젠더 디스포리아는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회에서 어떠한 '성'으로 인식된다는 것 자체와 개인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트랜스젠더에게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기도 하다. <걸후드>에서 주인공 마리엠은 오빠에게 가정폭력을 겪는다. 일하는 것으로도 바쁜 어머니는 방관자의 역할에 그치고, 밑에는 두 여동생이 있다. 마리엠은 오빠의 폭력이 동생들에게 향하지 않도록 화가 난 오빠에게서 동생들을 숨기고 본인이 그 화를 다 감내하려 한다. 첫째 동생이 가슴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마리엠은 동생에게 장난을 치면서도 그 마무리는 엄마나 오빠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당부로 끝난다. 2차 성징을 통해서 여성들은, 준비되지 않은 채 여성으로, 성인으로 인식되고 그들에게 부과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위치에 종종 처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리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음이 쓰였다. 나의 유년시절을 돌이켜보면 리사에 제일 가깝지 않을까?하고도 생각했다.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면서는 무례한 농담에도 그냥 넘어가야 하고, 축구 놀이를 할 때면 항상 소외되어 '여자니까' 당연히 빠져서 멀찌감치 구경하고 물을 가져다 준다. 리사는 어쩌면 그런 제약 없이 자신과 화장놀이를 하다가도, 웃통을 벗고 축구를 하고 수영을 하는 것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는 로레를 동경한 것일수도 있다. 지금은 마냥 발랄한 잔도 좀 더 자란다면 역동성을 뺏긴 채 리사처럼 남자아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에 서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로레와 리사의 만남은 처음과 끝이 반복된다. 너는 누구냐는 리사의 물음은 같지만, 다만 로레의 대답이 달라진다. 자신을 소개하기도 주저했던 미카엘에서 로레라고 말하며, 살짝 웃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로레는 '이름'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자아를 투영하고 그로 존재하길 원했다. 단순히 호명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카엘', '로레'는 그 자체로서 성별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상대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때 이름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리사는 애초에 자신의 눈 앞에 선 사람이 '미카엘'인지 '로레'인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로레가 여전히 '미카엘'로서 살아가고 싶을지, '로레' 자신을 긍정하며 살아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취향들을 부지런히 탐구해가는 과정을 통해 분명히 가장 되고 싶은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덜 힘들어지길, 조금씩 더 행복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