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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해 Sep 19. 2021

델마, 신으로 거듭난 마녀

영화 <델마>가 그리는 새로운 공포 패러다임

 영화는 빙판 위를 걷고 있는 아이와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성을 담으며 시작된다. 잔뜩 춥고 서늘한 영화의 분위기는 남성의 총구가 사슴에서 아이의 머리로 향하는 순간 기괴함이 함께 증폭된다. 이어지는 대학교 광장의 풀 쇼트는 방향성을 가지고 어디론가 각자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길게 보여주더니, 방향을 고민하는 듯, 혹은 길을 잃은 듯 멈춰 선 델마에게로 줌 인된다.



 엄격한 집에서 통제 받으며 자라온 델마는 외롭고 반복되는, 그리고 억압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도서관에서 아냐가 델마의 옆자리에 앉은 뒤, 새들이 창문에 부딪히고 델마가 발작을 일으키며 '각성'하기 전까지. 양육자의 통제와 약물로 본능과 힘을 억압하고 자라온 델마는 욕망의 대상인 아냐를 만난 이후 알 수 없는 현상들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일으킨다.


 <델마> 사실 공포보다는 퀴어라는 카테고리에 더욱 적절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는데, 델마가 관심을 가지게  여성인 아냐와의 관계와 델마의 성지향성이 영화 초반을 이끌어가는 주요한 플롯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답답함은 지식도, 능력도 모두 감춰야 하고 감정마저 감추며 회개하듯 기도문을 외우는 델마의 모습에서 기인하는  보인다. 하지만 델마는 아냐를 향한 감정들에 괴로워하면서도 아냐가 말을 걸고 자신을 찾아오게 하고, 호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델마가 욕망을 느낄   욕망은 ''으로 형상화된다. 델마의 혼란과 발작의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델마가 누구인지는 영화의 후반부로 향할 수록 선명하게 드러난다.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의 역사와 할머니와의 만남으로 영화는 뚜렷한 주제 의식 '마녀' 제시한다.


 페미니스트여서, 여성을 사랑해서, 질병이 있어서, 혹은 질병이 있는 이들을 고쳐서, 온갖 이유로 '마녀'라고 불리우며 죽임을 당한 마녀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다시 공포와 문제를 일으키며 벌을 주어야 할 대상으로 재현되며 시대의 입맛에 따라 '정상'사회, '주류' 사회인 남성들로 인해 그 계보를 이어갔다. 폭력적이고 지난한 계보를 목도한 델마는 분노한다. 분노하고, 마녀가 아닌 신으로 거듭나 남성으로 대표되는 억압의 대상인 아버지를 벌한다. '불'은 아버지가 어린 델마의 손을 가져가 말한 지옥의 고통, 마녀 사냥의 화형,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죽음을 촉발하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반면 '물'은 처음 델마가 아냐와 대화하는 학교 수영장, 아버지를 죽이며 동시에 아냐를 살려내는 공간이 되는 호수를 상징하며, 또한 '불'과 반대의 속성을 가진다. 수영장 속에서 갇히기도 하며 델마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던 '물'은 델마가 새를 토해내며 억압에서 해방되고, 비로소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임으로서 델마가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 시작에서처럼, 대신 혼자가 아닌 아냐와 손을 잡고 뚜렷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델마를 줌 아웃하며 마무리된다.



 델마는 이로서, 그의 조상이었던 마녀들처럼 단순히 희생되지 않는다. 싸이코패스로 인해 비명을 지르고 잔인하게 신체가 훼손되는 여성 피해자도 아니고, 희생되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도 아무런 주체성이나 힘 없이 공포를 유발하는 기능으로서만 존재하는 여성 귀신도 아니고, 강한 힘에 대한 순수한 공포와 경외심을 일으키고 그 모든 것들의 위에 그저 '신'으로 군림한다. 과거 자신의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자매들을 보듬으며 신으로 각성한 여성 퀴어 주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비로소야 공포/스릴러물을 즐길 수 있게 된 관객으로서, 이 새로운 시대에 무한한 반가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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