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자고 말해주면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과 가고 싶은 장소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아이스크림은 <현실의 비현실>이니까.
이 <현실의 비현실>은 반대로 ‘비현실적인 현실’을 일컫는 것으로 내가 만든 개념이다. 맞닥뜨렸을 때 신기하고 신비롭지만 그래도 현실의 범주 안에 자리한 것들. 예를 들자면 날개 달린 말이나 하늘을 나는 물고기 모두 <비현실>인 것 같지만, 유니콘은 <비현실>이고 수면 위 2-3m를 날아다니는 날치의 존재는 <현실의 비현실>이다. 유니콘 대신 일상에서(나의 경우 촬영장에서) ‘뜬금없이’ 눈처럼 새하얀 말을 마주치는 사건 역시 <현실의 비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뜬금없이’가 포인트다. 현실이란 경계의 모서리를 쾅쾅 균열 내는 것. 그리고 그 빈틈에 판타지를 콸콸 부어버리는 일. 걸음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지구에 아슬아슬하게 땅을 붙이고 있는 것.
차가 하나도 없는 8차선 도로(주로 명절 찰나의 서울이나 월드컵 등이 열리는 날), 4월에 내리는 눈, 눈처럼 내리는 벚꽃, 비 오는 날의 바다 수영, 까맣거나 춥지 않은 밤, 육교라는 존재, 무지개와 무지개 조각(하늘에 뜬 것 말고, 계단, 유리, 분수 등에서 어쩌다 생기는 무지개를 -역시 내 맘대로- 뜻함) 출근하지 않는 평일의 출근시간,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야밤 드라이브,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묘하게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날씨, 해외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에 듣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 속에 내가 있는 영화관이 등장하는 일(실제로 겪음), 옷과 꽃을 포함해 기능은 없고 꿈은 깃들어 있는 모든 것.
아이스크림은 이 세상 것이지만 너무 근사한 나머지 이 세상 것 같지 않다. <현실적인 비현실>의 음식 버전이다. 차갑고, 달콤하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눈 앞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너무 쉽게, 너무도 연약하게 형태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르르. 그렇게 녹아버리면 쥐고 있던 손은 끈적임만 남아서 곤란해지고. 배를 채우거나 영양을 섭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순수한 쾌락이라는 점이나 그래서 소량의 독과 같다는 부분은 마법 같기도 하면서 언뜻 사랑의 모습과도 닮았다.
어릴 때 치과에 다녀오거나 예방 접종을 맞고 돌아오는 길엔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어린 영혼이 탈탈 털린 데에 대한 보상이었을 테다. 입안의 마취주사가 덜 풀린 채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피가 나는 일도 있었지만, 과자나 사탕 같은 게 아니라 매번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던 것 같다.
사귀었던 사람도 아이스크림을 종종 사주었다. 정작 자신은 단 걸 먹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가끔 아이스크림을 고르지 않는 날엔 ‘왜 아이스크림 안 먹어?’ 하고 어딘지 아쉬운 목소리로 묻곤 해서 마음이 별로 동하지 않던 한밤에도 아이스크림을 집어 가볍고 매끄러운 포장을 벗겼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즐거워했고, 나 역시 동동 들뜬 기분으로 그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일도, 먹는 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또 동시에 상대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자고 말해주면 좋겠다. 커피 한 잔 하거나 밥 한 번 먹자 같은 말도 괜찮지만,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라는 말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설레게 할 테니까. 가볍고, 사랑스럽고, 다 믿어버리기에는 영 불안하고, 그렇지만 그 순간에는 온전한 마음 같은 것에는 잠시 속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