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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Aug 15. 2024

<러브 라이즈 블리딩> 이전에 <바운드>가 있었다

영화 <바운드>를 보고

<러브 라이즈 블리딩> 이전에 <바운드>가 있었다. <바운드>는 ‘퀴어 느와르’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화다. 남성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마피아 집단 속에서 피어나는 여성들의 사랑, 탈주, 해방까지를 보여주는 영화. 이 지점에서 <러브 라이즈 블리딩>과 <바운드>는 닮은 바가 많다.


<바운드>는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된다. 영화의 서사에 핵심적인 여러 대사들이 보이스 오버로 흘러나온 뒤 비춰지는 결박된 코키의 모습이 이 작품의 시작이다. 어쩌면 이 작품은 모든 패를 까발린 채 작품을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품이 시작되며 이 작품은 ‘시선’과 ‘섹스’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암시된다. 한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함께 탑승하는 주인공 코키와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파트너로 보이는 남성과 함께 있음에도 그에겐 관심을 주지 않고 코키와 강렬한 눈맞춤을 나눈다. 그리고 코키의 시선은 바이올렛의 다리로 향한다. 특별한 대사 없이 그들이 첫눈에 반했음은 시선의 전개만으로 읽힌다.


이후 배관공으로서의 코키가 다루는 공구에 적힌 ‘삽입’에 대한 주의 문구, 코키의 집을 찾아온 바이올렛이 던지는 ‘손재주’에 관한 말들. 얼마 지나지 않아 귀걸이가 배수구에 빠졌다는 핑계로 코키를 자신의 집으로 부르는 바이올렛. 배수구를 공구로 다루는 손길,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 그 뒤로 비춰지는 바이올렛의 다리까지. 더이상 구체화시켜 말할 것이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


그러나 마피아의 정부로 사는 바이올렛과 그들에게 고용된 코키에게 사랑이란 가능할리 없는 법. 이들은 그들에게서 벗어나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운드>의 시작이다.


‘돈을 들고 튀자’는 과제를 안고 시작된 이들의 서사는 쉽지 않게 전개된다. 남편인 시저를 속여 돈을 훔치려고 했던 두 사람의 계획은 탄로난다. 그렇게 오프닝 시퀀스의 이미지는 서사 속에서 실현된다. 코키는 바이올렛을 두고 돈을 들고 도망칠 수도 있지만, 이미 바이올렛을 사랑하게 된 코키는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코키는 바이올렛을 구하기 위해 시저의 집에 제발로 들어가 시저의 손에 결박당한다.


이제 바이올렛이 나설 차례다. 시저는 바이올렛을 이용하여 시저가 윗선에 넘길 돈을 잃었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것을 역이용한다. 자신을 연약하게만 바라보는 마피아 집단을 이용하여 시저의 삶을 파국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이때 단순히 ‘강한 여성’인 코키에게 오직 의존만을 하는 것으로 비춰졌던 바이올렛은 코키를 구원해내며, ‘상호 구원’의 서사를 완성해낸다.


시저가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바이올렛은 시저에게 총을 겨눈다. 그러자 시저는 바이올렛이 자신을 죽일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러자 바이올렛은 “시저, 당신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라며 시저를 가장 잔혹하게 죽인다. ‘살인’을 성취한 뒤에도 이어지는 총격은 그녀의 분노를 보여준다. 그 순간 쓰러지며 극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벗겨진 머리는 그의 권위를 더욱 더 실추시킨다.


그렇게 바이올렛은 마피아 집단을 벗어난다. 코키와 몰래 챙긴 돈은 비밀로 한 채,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윗선에 마지막 키스를 건네는 바이올렛은 더없이 이 서사에 필요한 존재다. 코키가 없었다면 시작될 수 없었을 이들의 계략은 바이올렛이 없었다면 깔끔히 종결될 수 없는 것이다. 무의미한 키스를 끝낸 뒤, 뒤돌아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미소는 승리를 뜻한다. 두 사람은 이렇게 남자들을 속이고, 걸림돌을 제거한 채 자신들의 사랑을 성취한다.


이 영화의 제목인 바운드는 ‘묶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이미지적으로 끈을 활용해 결박되는 사람은 코키와 바이올렛, 즉 여성들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에서 ‘묶인’ 존재는 누구인가. ‘남성성’의 굴레에 속박되어 ‘여성’을 연약한 존재라 단정짓고, 죽임을 당하고 놀아나는 이들이야 말로 ‘남성성’에 ‘묶인’ 존재가 아닐까. 작품의 끝에 이르러서야 작품의 제목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품의 완성도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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