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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Jan 14. 2023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

1월도 절반이 지났다. 새해 첫 주에는 아껴둔 연차를 썼다. 미뤄둔 병원 순례를 하고 차 점검도 했다. 오래 쓰려면 어쩔 수 없지. 예산에 없던 소비에 고쳐 쓸 수 있는 게 어디냐며 애써 위로했다. 올해도 잘 부탁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몰래 쉬면 마음이 편하다. 이왕이면 남편도 모르게. 열심히 살았으면 쉬어도 되는데 어디서 시작된 죄책감일까. 아닌 게 아니라 급한 일들을 마치니 슬슬 불안해졌다. 쉬는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없다. 많은 걸 할 줄 알았는데. 상황을 눈치챈 남매의 늑장도 한몫했다. 책육아 인스타그램 속 아이들은 모닝 독서도 하던데, 현실은 달랐다.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겠다는 여섯 살 딸아이를 어르고 기억에도 없는 머리핀을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조바심을 내다 며칠이라도 천천히 보내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유 있게 재우고 먹이고 씻겨서 기관에 보내면 열 시. 집을 치우고 빨래를 개키면 오전이 다 간다. 거실 햇살이 길게 들어와 그림자를 그리는 시간이 고요하고 낯설다.


집에 있으면 부쩍 엄마 생각이 난다. 동네에서 피아노학원을 했던 엄마는 주로 바빴고 자주 아팠다. 나는 엄마가 일찍 죽을까 봐 늘 불안했는데 먼저 가신 건 건강했던 아빠였다.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엄마는 마흔에 암 수술을 했다. 내가 마흔을 앞두고 보니 너무 젊은 나이다. 무슨 암 환자가 이렇게 예쁘냐던 병원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병실에 누워 너는 시험기간이니까 오지 마 공부나 하라던 엄마. 어떤 기억은 그립지도 않은데 잊히지도 않는다. 그렇게 동동거리지 않았어도 좋았을걸. “엄마는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학원하고 너희 둘 키웠어.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서 너는 안 겪었으면 싶은 거야.” 그렇게 엄마가 남매의 등원을 도와주신 지도 3년이다. 몸이 약해 절대 애는 못 봐준다 그랬는데. 나는 늘 엄마에게 빚진 기분이다. 평생 갚을 수나 있을까.

새해 첫 주에는 책 선물을 받았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행복만큼 어렵고 흔한 것도 없겠다. 제목만 보고는 뭐 따뜻하고 예쁜 얘기겠지 했는데 웬걸, 너무 좋아서 페이지마다 인덱스를 다닥다닥 붙였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에게도 개그욕심이 있다. 숨겨둔 웃음 포인트에 누군가 웃어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조금 웃긴 글이 잘 쓴 글이라는 책 제목도 있지 않나. 그런데 이 책, 전혀 웃기지 않다. 주된 정서를 묻는다면 외려 슬픔이랄까. 동네 산책하고 꿀 사고 재활용하고 강아지랑 사랑한 얘기. 반려견의 죽음은 왜 이렇게 슬픈지. 역시 사랑과 죽음 앞에선 경중을 따질 수 없다. 대낮에 혼자 앉아 책 붙들고 펑펑 울었더니 뾰족했던 마음이 둥글어졌다.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깃들고 이렇게 서로를 비춰주는 조그만 빛이 될 수 있게 해 준 그 힘이. 말도 통하지 않고 종마저 다른 둘 사이에 사랑의 시간이 쌓여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닐까.”


제목 ‘아주 행복하다는 느낌’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여름밤 천둥소리에 몸 가까이 파고드는 강아지를 보며, ‘이 연약한 아이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구나. 내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전적으로 믿고 있구나.’ 그래서 감사해졌다고. 때로 나도 몰랐던 내 감정을 책에서 읽고 놀란다. 나는 사실 아이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두 아이 엄마가 될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마음은 이따금씩 과거에 가 있고 내 앞날은 불안한 인간일 뿐인데 가끔 아이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것만 같다. 아직은 무너진 적 없었을 투명한 기대에, 가능한 오래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임감도 사랑의 얼굴일 것이므로.


행복은 탄탄하고 좋은 관계에서 온다. 내가 한 말 아니고 하버드대 성인 발달 연구소에서 출간된 <굿라이프>에 소개된 내용이다. 인생은 원래 힘들고 고단한 과정이며 수많은 공격과 갈등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따뜻하고 연결된 관계’라고.


의외로 책 선물은 잘 안 하는 편이다. 내가 좋다고 남도 좋을 것 같진 않아서. 이 책 덕분에 책선물 받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이었어, 새삼 생각했다. 한참을 빠져 읽다 보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저자와 혼자 친해진 기분이다. 이해하고 이해받는 느낌이랄까. 저자의 마음, 읽고 좋아서 내게 건넸을 사람의 마음, 그리고 내 마음까지 보태 곱절로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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