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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Feb 25. 2024

상실의 축복

배수아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

유퀴즈 도박 중독 전문의 편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이 도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즉각적인 보상, 즉 도파민 과다에 있다. 도박으로 일주일에 5억을 따고 나면 월급이나 아이의 미소 같은 작은 자극에는 기쁠 수 없으며 지난 희열을 잊지 못해 결국 다시 카지노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 우리 뇌는 큰 자극을 맛보면 작은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파민의 반대편에 ‘상실’이 있지 않을까. 충격이 얼마간 극복됐다면 사소한 일상에 감사해진다. 그것을 상실의 축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 사이의 일이다. 3년간 기록한 인스타그램 계정을 잃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고객센터 신고부터 해커들과의 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진동하듯 보낸 사흘 후 다시 계정은 침묵. 나라 잃은 슬픔이 이러할까. 이쯤되니 내 노동력과 사랑을 갈아 넣은 공간의 이름을 바꿔 놀고 있는 튀르키예 잡범의 믿을 수 없이 뻔뻔한 행태에 울화가 날 지경이었다.


모호했던 상실은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보통 몇 시간 만에 인스타그램 계정을 열면 몇 백 개의 하트와 팔로워 이런저런 디엠들을 일하듯 처리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답답할 만큼 고요한 계정이 남기는 소외감도 기묘했다. 그게 뭐라고, 알량한 1만 팔로워 북스타그래머였던 나는 ‘누군가 찾아준다는 느낌’에 익숙해져 있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허상과 무의미한 바쁨, 계속되는 갈증,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대가로 놓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빼앗기지 않았다면 스스로는 절대 버리지 못했을 도파민 낳는 신기루.



“엄청난 일이 있었지만 단단히 마음잡고 버티길 바라며, 새옹지마, 중꺾마! “


토요일 아침 억울함으로 뻐근해진 어깨와 몽롱한 정신으로 휴대폰을 여니 J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젠가 맛있다고 했던 커피 선물과 함께. 덧붙이는 말은 이랬다. ”카페인을 너무 많이 섭취한 날을 위한 디카페인 커피야. “


힘든 일을 겪고 나니 진짜 내 사람이 남는다고, 신사임당 주언규가 그랬나. 진심으로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 잘하자. 클리셰 같지만 이번 사건의 교훈도 상실만큼 선명하다. 조용하고 다정한 응원들 모두. 고맙고 부끄럽고 미안해서 복잡하게 커진 사랑을 여기 작게 적어본다. 이렇게나 허술한 저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술해서 좋아하나…) 보안에 철저해질 것도 다짐.



해킹된 지 사흘 만에 읽기가 가능해졌다. 계정과 함께 그나마 남아있던 집중력도 도둑맞은 탓. 주초부터 들고 다니던 배수아 산문집을 주말에 겨우 완독 했고 여태 제목을 《작별의 순간들》로 오독했었음도 알았다. 저자는 쓴다.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 p.83


이야기 문법은 피하고 싶다는 저자는 끊임없이 시인 듯 산문인 듯 파편화된 글쓰기와 망각하는 책 읽기를 말하지만, 그 깊고 오묘하고 아름다운 작별들 순간들을 통과해 책을 덮으면 어렴풋이 깨닫는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일.

이 책은 그것의 기록이라는 것. 요약은 R에게 쓴 편지 속 문장으로 대신한다.


“세상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한 권의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그런 일들.” p.237


@luv_minyu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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