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먹고사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어쩌면 이런 소설을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전이 아무리 좋다한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오직 동시대 작가들만이 쓸 수 있으니까.
소설의 효용은 때로 여기에 있다. 타인의 시시콜콜한 마음의 소리, 지지부진한 일상을 듣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허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소수 열혈 독자만이 아닌 대중의 선택을 받은 소설들은 늘 삶과 가까운 데 있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 등 공감대가 큰 소설은 읽지 않는 시대에도 인기를 누리지 않았나.
결국 소설도 취향의 문제지만 소수자, 젠더, SF 장르가 지배적이었던 그간의 한국 문학 흐름 속 거부감 들지 않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도래가 퍽 반갑다.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손원평, 정아은, 한은형 등 포함 총 8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표제작, 최유안 《쓸모 있는 삶》, 손원평의 《피아노》, 천현우 《빌런》 순으로 좋았다. 대부분의 단편이 그렇듯 세밀화 같은 현실을 그려내 보일 뿐 답도 결론도 없다. 그럼에도 독자는 인간미를 잃지 않은 인물들의 소심한 반항, 용기, 짧지만 여운 담긴 문장들에서 옅은 희망을 읽는다.
“세상엔 다 요령이 있는 거야. 가끔씩은 아무 조언이든 경고든 해. 머리 꼭대기에 있는 사람처럼 굴어. 때론 장사든 세상이든 다 아는 것처럼.” -임현석 ㅣ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변하는 건 없었다. 고되게 노동하며 이렇다 할 절망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한국 젊은이들 중 하나가 나였을 뿐이라는 것조차.” - 최유안ㅣ쓸모 있는 삶
“외로움이 몰려올 때면 혜심은 기를 써서 그 감정을 떨치고 막아냈다. 외로움만큼은 돈으로 메워지지 않는 감정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 손원평ㅣ피아노
“작가라면, 읽을 만한 글을 썼으니 이래도 안 읽을래 하는 패기가 우선이다.”
얼마 전 황석영 수상 불발을 언급하며 K-문학의 미래를 염려한 칼럼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읽지 않는 세태를 원망하기 전에 고민하고 시도하라는 것. 동시에, 웹소설이 인기인 이유도 짐작이 됐다. 소설 쓰는 의사, 약사, 변호사, 건축가, 과학자.. 소설 쓰는 전문 직업인이 웹소설 분야에 그렇게 많다던데. 부러운 마음을 접고 생각하면 희망도 보인다.
읽지 않는 시대에도 읽힐 만한 글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허구와 개인의 입체적인 경험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알지만 알지 못하는, 보이는 삶이 아닌 다른 삶.
언제부턴가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됐는데 실로 오랜만에 한국 소설의 매력을 실감했다. 나 현실적인 소설 좋아했지. 김애란, 정이현, 박민규 읽던 시절도 떠오르고. 조금 과장됐을 뿐 어떤 부분은 너무 내 얘기같고 주변 이야기 같아서 아무때나 펼쳐 읽어도 몰입이 잘 됐다. 어디가서 말하긴 부끄럽지만 공감되는 마음의 소리, 지극히 현실적이고 혹독하며 숭고한 밥벌이 이야기.
‘월급 사실주의’ 동인은 장강명을 필두로 한 작가들의 모임이다. 노동 앤솔로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후 두번째 책.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문제 의식을 지닐 것, 최근 5년 이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할 것, 직접 발품을 팔아 취재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쓸 것, 을 원칙으로 한다고. 과연 장강명다운 기획이다. 패기가 돋보이는 소설집.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