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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베 May 11. 2024

스웨덴 외노자의 1년 생존기

살아남기 위해 적었던 2020년의 흔적

 스톡홀름에 이주한 뒤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외국에서 살다 보니 세상 일이 내 맘대로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되니 한국에서는 걱정할 일 없던 고민도 하게 되었었는데 그래도 성공적인 이민을 해낸 분들께 여러 조언들을 구해가며 간신히 1년을 버텨냈다.

 

 항공권부터 연봉협상, 집 구하기, 신분증 발급, 은행 계좌 열기, 직장 생활문제, 대중교통문제, 집 계약, 이사, 금리, 코로나 정보, 운전면허, 요리 재료 구하기 등등 크고 작은 부분에서, 돌이켜보면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정보 찾기도 쉽고 무엇보다 언어가 되니까 뭘 하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이 글에서는 1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것을 적어보고 싶었다.

 나는 한국 토박이이고, 한국의 보수적인 중공업 업계에서 잘 적응해서 10년을 일해온 만큼 원조 한국인스러운 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상명하복에 익숙하며, 상사든 사수든 누군가가 날 챙겨주고 대변해 주길 바랐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커서 거의 모든 것에 'Yes'를 말했고, 싹수없어 보일까 봐 혹은 멍청해 보일까 봐 의견을 말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고, 동료들이 바빠 보이면 질문하는 걸 미안해했으며,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정상적으로 착착 돌아가길 바랐고, 일할 땐 스스로를 쉴 틈 없이 가혹하게 몰아붙였고, 기존하던걸 답습하길 좋아하고, 새롭게 개척하는 모든 일들이 불편했으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걱정하고, 내가 옛날에는 이랬는데 같은 과거를 줄곧 회상하곤 했다.

 

 우선 이런 내가, 한국에서라면 모를까, 외국 생활에 적합한 유형이 결코 아닌 것은 인정해야 할거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니고 스스로 결정해서 나왔으니, 어떻게든 다른 존재로 변신해 살아남아야지.

 

 특히 올해 초까지는 소속된 조직 자체가 엉망이었던 까닭에 뭐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도 기준도 없이 자괴감과 남 탓, 내 탓, 인지부조화가 뒤섞여 눈물에 잠겨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아폴로 13이란 영화를 봤는데 우주선이 대기권에 진입할 때의 충격이 내 고통과 비교하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힘들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버티다 보니 매일매일 티끌만큼씩 좋아지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도 엉망진창이고 많은 걱정과 고민을 끌어안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라는 게 하나가 해결되면 또 하나가 생겨나고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샘솟는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일이 내 예상대로 흐르지 않더라도 좀 더 담담히 대응하게 된 듯하다.

 

나와 유사하게 한국인 마인드를 탑재한 채 주재원이나 현지 채용으로 스웨덴에 오시는 분을 위해, 도움이 되었던 마음가짐과 생존법을 적어본다. 언젠가 또다시 힘들어할 나 스스로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다.

 


 

1. 회사가 사람을 함부로 뽑지는 않는다는 것.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 나의 감정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 '내가 이 분야 최고의 프로이다, 내가 방향을 결정한다'라고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되뇔 것.

 

2. 스스로를 너무 푸시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합리적인 시간과 배움의 기회를 줄 것, 종종 시간에 맡겼을 때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점. 인생은 길고 승부는 지금 바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길 것.

 

3. 고충이 있다면 인사부, 매니저와 상의할 것. '조용히만 있으면 예뻐 보이겠지'라는 한국식 생각은 갖다 버리고 내 감정과 상황을 솔직하고 예의 바르게 얘기할 것. 내가 모든 문제의 해답을 미리 준비해 가져가서 요구하려 생각하지 말고, 문제를 일단 매니저 책상에 올려놓고 같이 해결할 의사가 있는지 상의하는 데서 출발할 것.

 

4. 아시아 고객들의 마음을 읽고 상품의 가치를 찾고 시장을 찾는 능력만큼은 절대로 유럽인들이 탑재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능력이라는 걸 잊지 말 것. 나는 언어도 미숙하고 느리지만 동료들이 인지할 수 없는 수많은 감각을 홀로 느끼고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무기로 삼을 것.

 

5. 세상일이 언제나 약속한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일 것. 매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방석이 깔려 있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도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드라이브 해나갈 것.

 

6. 내게 안전하고 편한 한정된 영역에서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는 사실은 진짜 나의 능력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할 것. 좁은 분야에서 이미 적응된 일만 반복했던 건 실력의 정체기에 불과했었다는 것.

 

7. 못하는 걸 억지로 잘하려 하게 하지 말고, 잘하는 걸 더 드러나게 할 것.

 

8. 모르는 게 있으면 무조건 동료에게 물어볼 것. 아무리 바빠 보여도 그냥 붙잡고 물어볼 것.

 

9. 뭔가를 새로이 창조하는 일에 익숙해질 것. 완벽히 새로운 걸 만들기는 어렵더라도 기존에 산재되어 있던 데이터를 수집해서 더 정돈된 형태로 변환시키는 것부터 시작할 것. 스웨덴에 비해 조직적 시스템을 갖춘 한국에서 일해왔던 경험 덕분에 데이터 체계화 능력이 탑재됐다는 점을 활용할 것.

 

10. 동료들에게 책임을 기대하지 말 것. R&R (roles & responsibilities)가 매우 불명확하고 담당자가 분산되어 있는 탓에 한 명에게만 모든 정보를 얻거나 책임을 지울 수 없고, 퍼즐 조각 맞추듯 여기저기에 물어보고 다녀야 한다는 것.

 

11. 혼자만 긴장해서 '업무! 업무!' 하지 말고 일상 속에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것. 행복할 수 있는 요소들로 나의 삶을 지지해 주는 베이스로 만들어 둘 것. 새로운 친구, 취미, 자연, 등등.

 

12. 무엇보다도 한국인으로서 해외에서 일하며 살게 된 것은 남들이 갖지 못하는 멋진 기회인 만큼 당연히 그만큼 더 힘든 시간이 있을 것이고 그만큼 더 공부해야 한다는 걸 언제나 기억할 것.

 

13.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극복한 스토리가 나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만의 극복 방식과 올바른 타이밍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많이 힘들 때 도움이 되었던 글과 사진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문근영 동물의 사생활에서...


마지막 촬영은 문근영을 펑펑 울리고 말았다. 마지막 날 펭귄 섬으로 향한 가운데 문근영은 자연에 맞서는 마젤란 펭귄의 용기와 당당함에 문득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문근영은 “그걸 보면서 날 되돌아보는 느낌이 들었다"라며 울컥한 모습을 보였다.


문근영은 “큰 파도든 작은 파도든 담담하게 그냥 살면 되는 건데 ‘그걸 저 친구들은 하고 있구나. 나는 그걸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 장면이 그냥 아름다웠다. 그런 펭귄의 모습, 자연의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나도 배운 것 같다"라고 고백했다.


누구나 큰 파도에 맞서야 할 때도 있지만 휩쓸리면 휩쓸리는 대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아르헨티나 펭귄은 문근영이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장면을 만들어줬다.


출처 : KBS '동물의 사생활' 2019년 2월 1일 방영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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