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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그림 그리기

by 게으른 곰

그림을 그린 지 40년이 넘었다. 우리는 모두 연필을 손에 쥘 수 있었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강아지도 그리고 고양이도 그리고 엄마도 그리고 친구도 그렸다. 우리는 어렸을 때 모두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나는 벌써 그림을 그린 지 40년이 지났다. 자라면서 그림을 계속 그리는 사람과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나는 그림을 계속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 이후로 쭉 내 꿈은 그림을 그리는 누군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렇게 되었지만, 그것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20대 때 다니던 회사를 지금까지 다녔더라면 내 친구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회사를 그만둔 나와 다르게 내 친구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면서 회사를 계속 다녔고 많은 성과를 이뤘다. 정말 장하다. 나는 임신 초기에 여러 힘든 일들을 겪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엔 진짜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오래간만에 수채,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려니 어색했는데, 금세 그림 그리는 게 좋아졌다.


Auckland Art Gallery cafe 가는 길

그동안 책을 몇 권 만들었다. 참 열심히 했다. 그런데 돈은 못 벌었다. 그림과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은 진짜 실력자다.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돈을 못 버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터전을 옮기고 2년 정도 그림을 그리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두는 것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잘한다. 책 작업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부담감이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있지만 지금은 그냥 그림을 그린다. 아무 목적이 없는 그림이다. 매일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어느 날은 하찮게 그리고 어느 날은 정성껏 그린다. 어느 날은 건너뛰고 어느 날은 고민을 열심히 하다가 하찮은 그림으로 끝난다. 그렇게 다시 그림을 그린 지 벌써 100일이 가까워온다. 나는 꾸준히 하는 것도 참, 잘한다.


오늘은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 전시를 보러 갔다. 반고흐와 피카소, 고갱, 마티스, 모네 등 모던 아트전이다. 고흐를 좋아한다. 이해가 안 된다. 그 시절 고흐의 그림은 왜 인정받지 못했을까.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어렵게 그림을 그렸지만, 물감을 두껍게 쌓아 그림을 그렸다. 그는 가난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가난과 타협하지 않았다. 고흐도, 고흐의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도 안타까운 인생이다. 평생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고흐의 그림 앞에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다. 말 그대로,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흐의 그림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또 한편으로는 덤덤히 슬프다.


고흐는 평생 37년을 살면서 유화 850점, 드로잉 1300점으로 총 2100개의 작업을 했다.


고흐(좌)와 고갱(우)의 그림

오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다른 때보다 더 즐거웠다. 전시를 보고 나오니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붓으로 천천히 면을 채웠다. 전시를 보고 오면 유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유화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렸었는데, 색이 오묘하게 섞이는 과정이 즐거운 재료다. 그림을 그리고 마르는데 오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옷에 많이 묻지만, 그래도 나는 한 가지 재료로 그림을 죽을 때까지 그려야 한다면 유화를 선택하고 싶다. 여러 편의성 때문에 유화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로 그림을 그린다. 재료들마다 나름이 멋이 있다. 요즘은 과슈로 그림을 그리는데, 이 과슈 물감은 10년 전 사용하던 것이다. 여전히 제 색을 낸다. 그 덕에 10년 전에 그림 그리던 때가 종종 기억난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직 어색하던 그 시절, 그래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그때가 제일 열정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뭔가 해내고 싶었는데, 지금 내가 뭔가 해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제 다른 작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권 없는 그림이 제일 좋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서 나보고 잘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책 작업을 못하는 게 슬프다고 했다. 오늘도 그 말이 생각난다. 나는 낭만 있는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인데, 낭만 있는 할머니가 이권 없는 그림을 그리며 살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림으로 낭만을 한가득 그려놓고 죽어야겠다. 애들이 내 그림을 보며 엄마는 지겹게 그림을 많이 그렸었다고, 그렇게 나를 추억할 만큼. 그리고 당분간 이권 없는 그림을 더 그려볼 생각이다. 점점 더 행복해지는지, 점점 그림이 더 좋아지는지, 나 자신이 더 좋아지는지는 글로 남겨야지.


오늘도,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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