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Jun 2025
2023년 4월, 뉴질랜드에서 살기 시작한 첫 해에 오클랜드 시티에서 어반 스케쳐스 모임을 처음 봤다. 수십 명, 아니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티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사거리 풍경을, 어떤 사람은 상가를, 어떤 사람은 사람들을 그렸다. 신기해하면서 Albert Park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공원을, 새와 나무를, 하늘을 각자의 개성대로 스케치북에 남기고 있었다. 무슨 사생대회 같은 건가 생각했다. 마침 그 부근에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도 있었기 때문에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조끼를 입고 자원봉사하는 분에게 그들의 정체를 물어봤다. 그렇게 그날 처음 Urban Sketchers에 대해 알게 됐다.
어반 스케쳐스는 미국 시애틀의 Gabriel Campanario가 처음 시작한 아트 커뮤니티다. 전 세계 도시에서 동시에 활동 중이며 뉴질랜드엔 오클랜드와 웰링턴, 타우포, 더니든, 로어 허트, 타라나키에서 활동 중이고 한국은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등 총 23개 도시에서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매년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도시 중 한 곳을 정해 세계의 어반 스케쳐스들이 그곳으로 모이는 International USK Symposium이 열리는데, 마침 2023년이 오클랜드가 선정된 해였고 그 풍경을 우연히 내가 발견한 것이다. (이쯤 되면 이것은 운명이 아닌가 가끔 생각한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나도 저 그룹에 가입해 활동을 해야겠다고 그날 생각했었다.
그 후, 어반 스케쳐스 모임을 참석한 건 그 일이 있고 1년도 더 지나서였다. 2024년 10월 나는 처음 어반스케쳐스 오클랜드 모임에 갔다. 야외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는 모임의 장소는 매번 달라지는데, 나의 첫 장소는 오클랜드 북쪽 푸호이었다. 이렇게 북쪽으로 많이 올라가 본 건 이때가 처음이고 아직도 그렇다. 공지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고,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각자가 좋아하는 곳에 자리를 잡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푸호이 카페에 자리를 잡았고, 다른 재료 말고 파란색 볼펜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다른 분들은 주로 수채물감과 펜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펜화나 수채화보다 색연필이나 과슈 그림을 많이 그린다. 그리고 풍경을 그려본 적은 거의 없다. 그래서 어떤 재료를 가져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볼펜 하나를 챙겼다. 그리고 첫 모임의 긴장감을 잔잔히 느끼며 선을 쌓았다. 3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어색한 첫 모임이 지나고, 그 후로도 2-3번 더 모임을 나갔다.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됐고 한국에서 방학을 보낸 뒤 올해 2월, 다시 모임에 나갔다. 하버 브리지에서 모였었는데, 그땐 목탄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직 야외에서 채색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아 어떻게 뭘 챙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모임을 나가지 않았다. 꾸준히 나갔어야 했는데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4,5월을 무척 힘들게 보냈다. 6월이 되자 스스로 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오늘, 오래간만에 다시 모임에 참석했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갔다. 고민될 때는 그냥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마침 그 사이에 나는 매일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고, 그 영향 때문인지 오늘 모임엔 과슈를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첫 채색에 도전한다.
오늘 모임 장소는 Browns Bay다. 이미 몇 번 가본 장소라 주차 자리와 모임 장소 모두 알고 있다. 마음이 한결 편하다. 처음 가보는 곳은 주차를 어디에 해야 할지, 모임 장소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미리 생기는 부담감이 있다. 오늘은 편안한 마음이었는데, 그 이유 때문에 늑장을 부렸더니 간당 간당한 시간에 겨우 도착했다. 어반 스케쳐스 오클랜드를 이끌고 있는 에릭의 간단한 인사를 듣고 모두 흩어졌다. 나는 나무 밑, 바다와 절벽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변가였기 때문에 캠핑 의자 한 개를 챙겨갔다. 짐이 많았다. 의자, 물감과 스케치북, 가방, 커피를 모두 들고 가느라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는 느낌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선 몇 개를 스케치북에 그리며 구도를 잡았다. 스케치를 정교하게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넓은 하얀색 면에 밑 색 작업을 했다. 물감이 마르길 기다리며 남편과 통화를 했다. 오래간만에 모임에 나왔다고 하니 덩달아 반가워한다. 남편은 내가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걸 응원한다. 아마 내가 외로울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모임에 오기 전, 혹시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없을까 해 sns에 올려봤지만 오늘도 혼자다. 괜찮다. 혼자 그리는 그림도 즐겁다. 어느 때는 혼자 그리는 시간이 심심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많이 풍요로워졌다. 아직은 그리 춥지 않은 날씨 덕분에 무난한 시간들이 흘렀다. 음악을 들으며 이리저리 붓을 움직인 3시간은 평화롭게 지났다.
3시 30분에 다시 모였다. 2시간 30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도 완성을 못했다.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한 번도 완성을 했다는 만족을 느낀 적이 없다. 오늘 처음 참여한 젊은 커플도 시간이 부족했다고 헸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나보다. 모두의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서로의 그림을 감상한다. 감탄이 나오는 그림도 있고, 새로운 시선이 느껴지는 그림도 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림도 있고 그림과 글자가 어우러진 작업도 있다. 한 장소에서 각자가 발견한 아름다움이 이렇게 다양하다. 모두 아름답다. 누군가 내 그림을 궁금해했고, 재료와 그림표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매번 영어가 아쉽다. 영어는 처음보단 늘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하루 중 영어 공부를 하는 시간을 1시간 정도 끼워 넣고 싶다. 충분히 끼워 넣을 수 있다. 수많은 게으름 사이에 넣으면 되는데, 게으름이 너무 꽉 끼어 꼼짝도 안 한다. 자꾸 영어 공부에 대한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조만간 게으름 한 시간 대신 영어 공부 시간이 내 일정이 추가될 것 같다. 서로의 그림에 대한 감상과 대화가 끝나면 단체 사진을 찍고 그날의 모임이 끝난다.
전에는 풍경화에 관심이 없었다.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풍경보다 사람이나 동물을 그리는 일이 더 재미있었다. 이 생각이 어반 스케쳐스 모임을 나가면서 바뀌었다. 다른 사람의 세상을 엿볼 수 있고 그때의 색과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잠깐 살다가 언젠가는 떠날 이 나라의 아름다움이 스케치북에 한 장, 한 장 쌓일 것을 생각하니 무척 값진 일처럼 느껴졌다. 되도록 모든 모임을 가고 싶은데 어느 날은 피곤해서, 어느 날은 너무 멀어서, 어느 날은 도로가 복잡해서, 사실은 그냥 귀찮아서 자꾸 빠진다. 오늘의 좋은 기억을 잘 간직해 다음 모임에도 꼭 나가야지 다짐해 본다.
요즘 그림 그리는 게 즐겁다. 아직 내 마음에 차는 그림이 안 나오고 있지만 계속 그리다 보면 언젠가 내가 마음에 쏙 들어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당분간은 즐기고 싶다. 작업해야 되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일단 실컷 즐겨보려고 한다. 아마 올해는 그렇게 지나가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책을 꼭 내고 싶었는데, 잠깐만 덮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