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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꼭대기 나무를 베어버린 사람

17JUN2025

by 게으른 곰

오클랜드 시티 남동쪽엔 Cornwall Park라는 큰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서울 남산공원이나 센트럴 파크보다 조금 작은데, 축구장 390개를 이어 붙인 크기라고 한다. 실제로 공원에 가면 잔디와 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본 뉴질랜드 나무 중 큰 나무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내가 두 팔을 벌려도 나무의 한쪽도 차지하지 못할 만큼 큰 나무가 많다. 집이 근처였다면, 나는 매일 이곳에 가서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Cornwall Park는 1901년 시드니 출신 사업가이지 정치인이었던 Sir John Logan Campbell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공원으로 기부했고 공원 이름은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Duke of Cornwall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뉴질랜드는 역사적으로도 현재에도 영국과 연결된 지점이 많다. 화폐에도 영국 여왕의 사진이 있다. 곧 바뀔 것이라고는 하지만, 찰스왕이나 다음 왕의 사진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 국기에도 영국 국기인 Union Jack이 있다. 실제로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식민 역사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키위들은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마오리 문화를 존중하며 함께 공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오리인의 생각은 어떤지, 언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본다.

Cornwall Park엔 큰애가 양궁 시합이 있어서 한 번, 산책하러 한 번, 그리고 오늘은 커피를 마시러 갔었다.


지난주는 내내 비가 왔다. 계속 비만 온건 아니고 비가 내리다가 개었다가 다시 비가 내렸다. 이런 날씨는 뉴질랜드에서 흔하고 흔하다. 특히 겨울이면 하루 종일 맑은 날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득 일 년 중 뉴질랜드에 비 오는 날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졌다. 분명히 절반이 넘을 거라고 생각해고 챗 GPT에게 물어봤다.


연간 평균 강우일


뉴질랜드(오클랜드) 135-145일 / 이슬비 포함 160-190일

한국(서울) 100일 (대부분 여름)


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비가 오는 날이 적다. 내 느낌엔 365일 중 200일은 비가 오는 느낌인데 말이다. 아마 내가 여름동안 뉴질랜드를 떠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름엔 비가 많이 안 오는데, 그 좋은 계절에 나는 한국의 겨울로 떠난다.

IMG_2947.jpg Cornwall Park

결론적으로,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커피 마시러 가는 길이 행복했다. 뉴질랜드에서는 날씨만 좋아도 행복하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미세 먼지 없는 공기. 노래가 절로 나왔다. 카페에 도착해 Oat Milk Flat White를 주문했다. 어느 쪽에 앉고 싶냐는 질문에 카페 안쪽 자리에 앉겠다고 했다. 겨울이 오는 중이라 밖이 쌀쌀했기 때문에 카페 안은 따뜻할 거라고 기대했지만 카페 안도 추웠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바깥쪽 해가 비치는 자리에 앉을걸 하고 후회했지만 자리를 바꾸려면 괜히 번거로울 것 같아 그냥 앉았다. 아침이라 카운터 쪽엔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새도 몇 마리 있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엔 새가 테이블을 차지하고 식사를 즐겼다. 너무 많이 본 광경이라 아무렇지도 않다. 빵 부스러기를 야무지게도 쪼아 먹는다. 놀라는 사람도 없고, 내쫓는 직원도 없다. 새의 아침 식사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주문한 플랫화이트가 나왔다. 이런, 큰 사이즈로 시켰어야 되는데, 깜빡했다. 대게는 주문받는 사람이 사이즈 확인을 다시 한번 하는데, 이곳은 사이즈를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낭패다. 4-5 모금이면 빈 잔만 남게 될 것이다. 입속에서 ‘라지 오트밀크 플랫화이트’를 몇 번 중얼거려 본다. 세트로 입에 붙어야 한다. 원래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노만 마시다가 뉴질랜드에서는 롱블랙만 마셨다. 나는 쓴 맛을 좋아한다. 그래서 맥주도 IPA가 좋다. 롱블랙은 작은 잔에 담겨 따뜻한 물과 함께 나온다. 롱블랙은 이름처럼 에스프레소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커피를 내린다고 한다. 롱블랙도 에스프레소처럼 사이즈가 없다. 2년 내내 사이즈 없는 롱블랙만 주문하다 보니 사이즈와 우유의 종류를 붙여 주문하는 게 입에 붙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슬픈 일이 종종 생기는 것이다. 요즘 식도염 증세가 조금 느껴져 우유가 든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를 끊을 용기는 아직 없다. 부디, 할머니가 돼도 커피와 음주를 여전히 즐길 수 있길, 조용히 바랬다.


IMG_2959 copy.jpg Cornwall Park Cafe

친구들이 도착했다. 우리는 오늘 2번째 만난 사이다. 그런 거 치고는 꽤 죽이 잘 맞는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눴다. 내가 올 겨울은 꽤 견딜만하다고 했더니 다른 친구가 아직 겨울은 시작도 안 했다고 한다. 너무 성급했나 보다. 이번 겨울은 많이 춥지 않게 해달라고 믿는 신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또 한 번 기도했다. 한참 수다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공원 꼭대기에 있는 One tree hill에 가기로 했다. 지금은 뾰족한 탑만 남아 있지만 예전에 탑 옆에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것을 베어버렸다고 했다. 너무 슬픈 이야기다. 우리나라 남대문에 불이 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을 안고, 이제는 이름만 남은 언덕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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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ree Hill 오르는 길, 그리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이다.

초입부터 숨이 찬다. 확실히 체력이 떨어졌다. 요즘 통 운동을 못했다. 시간은 많았는데 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커져 버렸다. 그래서 이런 높지 않은 언덕을 오르면서도 숨이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올라가는데 혼자 큰 숨을 내쉬는 게 괜히 싫었다. 운동을 해야겠다. 나는 매일 다짐하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짐들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짐 속에 파묻힌 나를 가만히 생각했다. 그냥 일단 다 쓰레기통에 넣어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계획을 많이 세우지 않기를 또 한 번 다짐했다. 일단 빈 다짐 상자에 처음 들어간 다짐이다. 그러니 한동안은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야겠다. 남편이 다음 주에 뉴질랜드에 오는데, 적어도 남편이 돌아갈 때까지만은 다짐을 하지 말아 봐야겠다. 어느덧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선 오클랜드가 한눈에 다 보인다. 아름다운 뉴질랜드가 보인다. 눈과 마음에 아름다운 풍경을 꾹꾹 눌러 담아 언덕을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니트 상의를 벗었다. 덥다. 왠지 운동을 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종일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날도 있는데, 이 정도면 각 잡고 운동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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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갈때와 다른 경로로 내려왔다.

집에 돌아와 언덕 꼭대기에서 오클랜드를 한눈에 담으며 평생을 살았을 나무를 떠올렸다. 궁금해서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검색했다.


언덕 꼭대기에는 토종 나무인 totara가 있었지만, 1852년에 폭풍으로 쓰러졌고, 그 이후에 몬테레이 소나무가 심겼다. 하지만 1994년에 마오리 활동가 Mike Smith는 그 나무가 마오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대표하지 않는다며 항의의 뜻으로 그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2006년에 마오리와 유럽계 뉴질랜드인의 협력으로, 토종나무 두 그루가 다시 심어졌고 지금 자라고 있는 중이다.


라는 놀라운 내막을 알게 됐다. 나는 우리나라의 남대문처럼 개인의 사회적 불만 표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식민지 역사가 그 나무에도 연관되어 있었다. 마오리 국회의원이 마오리족과 유럽인들의 와이탕이 조약(1840년 마오리족과 영국 왕실 사이에 맺어진 조약: 뉴질랜드 통치를 합법화하면서 마오리의 권리를 인정하는 내용) 사본을 찢어버린 일도 얼마 전에 일어난 것을 보면, 마오리와 유럽인들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00년 가까이 지나도 역사는 잊히지 않는다.


마오리 친구가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이렇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가 오늘 또 생겼다.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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