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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라퍼

18 JUN2025

by 게으른 곰

‘웬 오지랖이야’

나도 살면서 들어본 경험이 있는 것 같다. 호의로 시작한 일이 다른 사람은 선을 넘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오지라퍼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사이 공간이 시간이 갈수록 넓어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내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상대도 나도 조심스럽게 여긴다. 불편함이나 조금은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다. 점점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삭막함까지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일례로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의 무표정한 표정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말을 걸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말을 건네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혹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발 벗고 나서서 도우려 하는 사람이 한국인인걸 느끼게 되는 경험을 한 외국인도 많다.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기를 데리고 여행을 하는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한국 사람은 겉은 무뚝뚝해 보여도 속은 말랑말랑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한국인의 ‘정’은 진짜다.


나는 항상, 어떤 사람이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다. 그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가던 길을 가면 그만이다. 그중 누군가는 내 도움으로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낼 것이다. 아이나 개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건, 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이가 들어서인 것 같다. 개는 워낙 좋아했다. 요즘은 아기를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로 나의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는 이유도 같은 것이다.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이 가끔 그립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아기들은 모두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인 셈이다. 내가 미처 충분히 즐기고 사랑하지 못하고 지나간 그 귀한 시간들을 이제서 다른 아기들을 보며 충족시키고 있다. 아기 발이 담요 밖으로 나와있으면 담요를 끌어당겨 발을 덮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생기지만, 뉴질랜드 사람들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아이들을 따뜻하게 키우지 않는 것 같다. 마트나 길, 공원에서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 신생아를 몇 번이나 만났다. 처음엔 너무 놀라서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은 다른 문화에 대한 신기함 정도로 남아있다. 가끔은 나의 오지랖이 올라오려고 하지만 꾹꾹 눌러내고 있다.


지난 수요일, 영어 수업을 마치고 집에 막 도착했을 때다. 옆집 이웃이 그녀의 개와 밖에 나와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그녀는 여전히 밖에서 다른 볼일을 보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휴대폰을 차에 두고 온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밖에서 분주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중국인인데 작년에 내가 살던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들이 그 집을 구입하고 입주를 원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개 이름은 Eddie다. 에디는 40kg이 넘는 대형견이다. 나는 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에디와는 벌써 안면을 트고 가깝게 지내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기 때문에 마주친 적이 거의 없고, 아이들까지 학교에 가면 그녀는 늘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몇 번 커피를 마시러 함께 가지 않겠냐는 질문에 그녀는 한 번도 수락한 적이 없었다. 말을 걸면 간단한 영어로 답하다 항상 휴대폰 번역기를 열어 나에게 보여줬다.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안녕! 잘 지내? 지금 뭔가 바쁜 일 있어? 나는 지금 영어 수업 다녀오는 길이야. 너도 혹시 영어 수업 가고 싶은 생각 있으면 얘기해. 내가 우리 학교 소개해줄게.’


안 바쁘다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영어 수업 이야기를 꺼냈다. 뉴질랜드는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료로 영어 수업을 지원해주고 있다. 나는 영어 수업을 돈을 내고 다니지만, 내 교실의 대부분은 무료로 수업을 듣고 있다. 다민족이 섞여 살고 있는 나라 특성상 언어의 장벽을 낮추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복지다. 다른 이웃 한국분에게도 영어 수업이 무료인데, 왜 안 다니시냐고 권해 그분도 다니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중국 사람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려는 참이다. 그녀는 영어 배우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먼저 Wechat 앱을 설치했다. 그녀는 그것으로 소통하자고 했다. 중국인이 즐겨 사용하는 앱이라 나는 친구가 그녀밖에 없다. 나중에 연락 주겠다고 한 뒤 내가 다니는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번 수업에 내 친구를 데려가도 되는지 물었다. 학교에서는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하고는 친구들 데려와도 괜찮다고 했다. 다시 그녀에게 영어 참관 수업에 같이 가보겠냐고 했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영어 수업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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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들르는 버켄헤드 도서관. 본인의 영어 레벨에 맞는 책을 빌릴 수 있다.

의외인 건, 영주권자들이 이런 시스템을 모르고 있거나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정보의 부족에서 시작되는 일인데, 그 장벽을 넘어서야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그 일이 있고 다음 주, 나는 그녀와 영어 수업을 함께 갔다. 그녀의 이름은 치앙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그날 처음 알게 됐다. 나는 인터미디어트 컨버세이션 수업을 가고 있는데, 그녀는 그 수업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을 어려워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중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녀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줬다. 그녀는 elementary class와 pre-intermediate conversation class, 영어 초보자가 들을 만한 수업 두 개를 듣기로 했다. 월, 수, 금 하루 5시간씩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값과 수업료 35달러를 냈다. 사무실에서 등록과 결제까지 도와주면서 옆에서 지켜본 나는, 치앙이 무척 부러웠다. 겨우 35달러 밖에 안 내다니! 하루 5시간씩 주 3일이나 공부하는데! 눈물이 찔끔 났지만 마음이 행복했다. 치앙은 열심히 영어를 공부할 거라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 했다. 드디어 다시 학교에 가게 됐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같이 기뻤다. 치앙이 영어를 배우러 가는 날, 어쩌면 에디의 실외 배변을 내가 도와줘야 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확실히 이번 일은 오지랖이 맞았다. 우린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지만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모두에게 정답일리는 없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사는 세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사람이 그것에 관심 있어하면 공유하면 되고 아니라면 그만두면 된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이 된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뉴질랜드에 사는 많은 이민자들이 영어를 여전히 어려워한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말을 하지 못하면 수많은 어려운 일을 겪어야 한다. 내가 이곳에 살면서 영어 때문에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은 뒤라 치앙에게도 권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게다가 수업도 거의 무료이지 않은가. 안 할 이유가 없다.

무슨 일이든 처음엔 잘 못하지만 언젠가는 잘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다. 그림 그리기도 그렇고, 영어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다. 그러니, 오늘도 내가 잘하고 싶은 것을 하자. 10분이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시간이나 양보다 꾸준함이다. 10일 하다가 하루를 못했으면 그다음 날 다시 하면 된다. 하루 못한 건 아무 일도 아니다. 2일을 못했으면 여전히 그다음 날 하면 된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잘하고 싶고, 완벽하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다. 모두 다 비워내야 하는데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고 모레도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될 것이라는 걸 믿는다.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더라도 괜찮다. 언젠가 나는 다시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오늘은 꼭! 영어로 일기를 쓰고 자야겠다. 게리가 자꾸 영어 일기를 보여주며 나를 자극시킨다. 그는 참 근면 성실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나도 그들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 내 영어 같은 반 친구들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불과 몇 주전엔 혼자였던 내가 어느새 이렇게 주변에 사람이 많아졌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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