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JUN2025
아침 6시 10분 전, 눈이 떠졌다. 이제 일어나는 시간이 6시쯤으로 정해졌나 보다. 6시에 맞춰놓은 알람보다 몇 분 일찍 눈이 저절로 떠진다. 잠에서 깨기 전, 항상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데, 꿈이었다가 점점 현실세계로 이동하면서 잠이 깬다. 아침 공기가 차다. 이제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다시 눈을 감았다. 찬 공기를 코로 깊게 들이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머릿속으로 그렸다. 오늘은 크리스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게다가 크리스의 친구들도 만날 것이다. 아직도 키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부담스럽다. 세상을 살다 보니 이런 경험도 한다. 한 번도 외국에서 살 것을 계획하지 않은 나는 어쩌다가 뉴질랜드에 와서 살고 있는지, 미리 계획을 했다면 조금 나았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 몇 년의 계획을 면밀하게 세워볼까 하다가 이내 다시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느긋하게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불과 3주 전만 해도 하루에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나는 요즘, 거의 매일 약속이 있고 해야 할 일정이 있다. 인생은 정말 예측 불가하고, 그래서 즐겁다.
머리가 여전히 아프다. 심한 두통은 아닌데 어제저녁부터 두통이 있다. 왼쪽 머리가 쿵쿵쿵 약하게 뜀뛰기를 하고 있다. 어제 커피를 건너뛰었다. 아마도 카페인 중독인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두통이 생긴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데, 어제는 정신없이 영어 수업을 가느라 커피 마시는 시간을 놓쳤다. 그랬더니 늦은 오후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오늘은 커피를 두 잔 마셔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의 꼬리를 잡다가 다시 얕은 잠에 들었다가 7시쯤 일어났다. 아이들 도시락을 싸고 학교에 보낸 후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라 얼른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오늘은 미션베이로 간다. Belly worship이라는 퓨전 중국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모이기로 했다. 오전 시간엔 브런치도 판매하는 것 같다. 오늘은 크리스와 그녀의 친구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다. 어쩌다가 키위들 모임에 가게 됐는지, 나도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설렘 반, 부담 반의 마음을 안고 모임 장소로 출발했다. 오늘도 날씨가 좋다. 파란 하늘이 잠시동안 두통을 잊게 했다.
미션베이에 도착해 해변 도로가에 차를 주차했다. 2시간 동안 주차를 할 수 있다. 뉴질랜드는 도심지역을 제외하면 어디든 주차를 쉽게 할 수 있다. 주차를 하고 나가려는 그때, 길옆을 지나는 크리스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나가 인사를 하고 크리스 옆에 있던 친구와 인사를 나눴다. 그 친구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항상 이런 식이다. 영어 이름은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들어도 금세 잊어버린다. 한국에서도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낯선 이름이라 그런지 더 안 외워진다. 그래서 오늘 만난 7명의 이름을 모두 잊어버렸다. 아! 브라이언과 맥스는 기억한다. 어째서 남자의 이름을 쉽게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만난 7명 중, 남자 두 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커피와 작은 파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 명, 두 명,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내 소개를 했다. 이젠 내 소개정도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자기소개를 이곳저곳에서 많이 하는 나는 아직까지 이방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모두 모이니 나까지 8명이다. 그들은 매주 목요일마다 동네를 바꿔가며 새로운 장소에서 만난다고 한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분의 여행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됐다. 나는 한국도 좋으니 한번 가보라고 했고, 그들 중 몇 명은 벌써 한국에 다녀왔다며, 한국 여행 이야기를 해줬다. 부산을 다녀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근처 맛있는 식당 추천 이야기로 옮겨졌고, 그러다가 삼성과 애플 휴대폰의 이야기로 흘렀다. 그들 중 절반 정도가 삼성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갤럭시의 카메라 성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미국 대통령 트럼프 이야기로 흘렀고 그러다 날씨 이야기, 그리고 에어프라이어의 편의성에 대한 이야기로 빠졌다가 다시 음식 이야기로 넘어와 한식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그렇게 오늘 이야기가 마무리 됐다. 다음 주엔 밀포드에서 만날 예정이니, 꼭 오라는 인사와 함께 우리는 헤어졌다. 밀포드는 우리 집과 가깝다. 그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느라 정작 몇 마디 하지는 못했지만 나를 챙겨주려는 그들이 고마웠다. 키위 억양의 영어를 들으며 오래간만에 즐기는 일상의 수다 시간이 꽤 즐거웠다.
모두와 헤어지고 크리스와 둘이서 미션베이를 걸었다. 언제 와도 아름다운 곳이다. 사실 뉴질랜드는 어딜 가나 아름답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바다가 어디에나 있는데, 바다에 올 때마다 행복한 마음이 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다음 주 목요일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요일에 남편이 온다. 모임 시간에 공항에 있을 것이다. 크리스는 언제든 내가 오고 싶을 때 참석하라고 했다. 크리스와 나는 다음 주에 연극을 보러 간다. 뉴질랜드에서 보는 첫 연극이다. 그녀 덕분에 많은 경험을 하고 있다.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를 챙기는 그녀가 고맙다. 바다 앞 벤치에 앉아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주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두통약을 먹었다. 두통은 여전했다. 커피를 한 잔 더 마실까 하다가 침대로 들어갔다. 왠지 몸이 무겁다. 잠깐 쉬다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 전기장판을 켜고 눈을 붙였다. 요즘 매일 일정을 소화하느라 꽤 지친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학교에서 돌아왔고 둘 다 침대에서 게으름을 조금 더 피웠다.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앞집 이웃 치앙의 아들이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가지고 왔다. 감사 인사를 하고 열어보니, 우리나라의 갈비찜과 비슷한 음식이었다. 중국 특유의 향신료 향이 났다. 빵을 조금 찢어 고기와 함께 먹었다. 이런 음식을 할 수 있는 엄마를 가진 그 아이는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었다. 영어 수업에 같이 가자고 내가 제안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치앙은 나에게 중국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가 가끔 가는 중국 식당 이름을 대며 거기 음식 맛있다고 했다. 그녀는 그 식당 음식보다 내가 더 잘할걸?이라고 하더니, 사실이었다. 덕분에 오늘 저녁은 훌륭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감사한 일들이 요즘 많이 생긴다. 내가 요즘 생기는 놀라운 일들에 대해 크리스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나에게, 어느 곳에 가든 새로운 환경 특히,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려면 2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 2년은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어를 못하니 친구도 사귈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내 영어는 그때보다 월등히 발전하지 않았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이제 조금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어딜 가나 예민하게 날 서있던 감정이 사라졌다. 편안하다.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제2막 뉴질랜드 생활이 시작될 것 같다. 앞으로 뉴질랜드에서 보낼 시간들이 즐겁고 신나는 추억으로 채워지길 가만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