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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때 일어나는 일

20 Jun2025

by 게으른 곰

요즘, 내 인생은 재미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라기보다 드디어 사람답게 사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영어 수업에 가 공부도 하고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뉴질랜드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인 게 첫 해는 좋았고 두 번째 해는 외로웠다.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제야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ART 모임에서 크리스를 만났다.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절반은 알아듣고 절반은 못 알아듣고 오지만, 그래도 괜찮다. 명상도 하고 그림을 그린다. 잠잠한 고요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 훈련을 한다. 영어 교실에서 만난 친구들도 점점 끈끈한 사이가 되고 있다. 수업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에서, 같이 모여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나눈다. 초코라는 이름을 가진 오이 같은 열매를 벌써 몇 번이나 받았다. 그녀는 초코가 정원에 너무 많이 열려 골치라고 말을 하지만, 따뜻한 정이라는 걸 안다. 두 번의 학기가 끝날 때마다 음식을 싸와 나눠먹으며 우리는 점점 돈독해졌고 이제는 what’s app으로도 소통을 한다. 이웃 치앙과 나는 1년이 넘게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그녀에게 영어 수업을 들어보지 않겠냐는 내 제안에 그녀는 선 듯 응했고 내가 다니는 학교에 함께 가서 수업 등록까지 도와줬다. 그녀는 어제 처음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늘 쑥스러움을 많이 탄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아들이 치앙이 만든 음식을 들고 왔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행복을 느꼈다. 나는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 작은 용기 덕분이다.


오늘은 조이가 우리 집에 올 예정이다. 조이는 아이와 함께 뉴질랜드에 왔다. 2년 계획을 하고 왔지만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사정 상 일찍 한국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비슷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 쉽게 마음을 열었다. 서로의 집이 가까운 편은 아니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든든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녀는 이곳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오늘 하루 묵으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이별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바쁘다. 청소도 해야 하고, 빨래도 돌리고 장도 봐야 한다. 미리 해놨으면 좋았겠지만, 그동안 내내 바빴고 피곤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탁기를 제일 먼저 돌렸다. 쌓인 아이들 옷과 그녀가 잘 침대 이불을 빨아야 한다. 시작 버튼을 누르고 밥을 먹으러 가려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세탁기가 작동하지 않는다. 물은 계속 콸콸 쏟아지고 있는데 세탁기 통이 그대로 멈춰있다. 원래는 빙글 비글 돌아야 한다. 물이 다 받아지고 잠시 상황을 지켜봤다. 역시 세탁이 시작되지 않는다.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켰다. 역시 같은 상황이다. 그때부터 바쁠 예정이었던 나는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세탁물은 물속에 잠겨있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덮고 잘 이불과 이틀 동안 쌓인 빨래를 해야 한다. 욕실엔 사용할 수 있는 수건이 2장밖에 남지 않았다. 닉이 떠올랐다. 닉은 내 집에 살던 사람이다. 그는 이 작은 세탁기를 나에게 넘기고 떠났다. 처음부터 나는 이 세탁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봐도 연식이 오래된 세탁기였다. 내가 그의 세탁기를 산 단 하나의 이유는 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탁기, 정원 테이블과 의자, 건조기를 300불에 나에게 넘겼다. 그의 냉장고도 300불에 구입했다. 나는 이사하면서 모든 가전을 사야 했고 그는 이사 가면서 사용하던 가전을 모두 나에게 넘겼다. 닉도 좋고 나도 좋은 거래라고 여겼다. 냉장고도 괜찮았고, 건조기도 괜찮았다. 정원 테이블과 의자는 낡고 후졌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세탁기는 처음부터 싫었다. 통돌이형 세탁기였는데 통 가운데 기다란 봉이 꽂혀있었다. 좌우로 찔끔찔끔 움직이는 세탁통이 과연 빨래가 되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게 했다. 이렇게 성능이 의심되는 세탁기는 처음 봤다. 닉은 나에게 잘 작동한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는 닉이 좋았다. 그는 나에게 늘 친절했고 호탕한 성격을 가졌었다. 그렇게 헐값에 산 세탁기는 1년 4개월 만에 고장 났다.


이 참에 세탁기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물에 흠뻑 젖은 빨래를 모두 건져 앞집 이웃에게 전화를 했다. 옷들은 이웃에게 부탁하고 이불은 차에 실어 코인 세탁소로 향했다. 빨래를 돌리고 건조까지 마무리 한 뒤 코스트코로 향했다. 오늘 조이랑 먹을 음식을 사려는 계획에 새 세탁기를 둘러볼 계획이 추가됐다. 코스트코 세탁기는 종류가 몇 가지 없었다. 너무 성급하게 사버리면 후회할 것 같아 장을 보고 다른 전자 상가로 향했다. 그곳엔 세탁기 종류가 많았다. 어차피 나중에 중고로 팔고 떠날 예정이니 비싼 것보다 실용적인 모델을 원했다. 직원에게 세탁기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면서 사용하던 세탁기 수거가 되냐고 물었다. 그는 가능하다고 말하며 배송비와 기존 모델 수거비가 129달러 추가된다고 했다.


뉴질랜드는 가전을 사도 배송비가 따로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뉴질랜드에서는 당연한 게 아니다. 배송비까지 포함에 1000달러 정도의 예산을 들여 세탁기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배송비를 처음부터 알았다면 고민을 안 했겠지만, 배송비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고민이 시작됐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면서 어차피 살 건데 그냥 살걸 그랬나 하고 후회를 했다. 집에 돌아와 장본 물건을 정리하고, 집을 정리하고, 건조기에서 말린 빨래를 개고, 침대이불을 세팅했다. 하필 오늘 아이들은 둘 다 바쁘다. 큰애는 양궁 클럽 활동 후 어떤 래퍼의 콘서트에 가기로 했고 둘째는 집에 돌아오니 이미 나가고 없다. 한숨이 나왔다. 체력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손님이 오기 전 마음을 다듬고 있다. 다행인 건 오늘 손님을 맞을 음식을 모두 사 왔다는 것, 오븐에 데워 먹기만 하면 되는 것들로 사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리까지 하기로 결정했었다면 눈물이 찔끔 나왔을 것이다. 마음을 다듬고 곱게 빗질하는데 글쓰기만큼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마음이 차분해졌고 힘든 것도 사라졌다.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평온한 삶이 며칠 이어졌으니 한 번쯤 사고가 터질 때도 됐지. 뉴질랜드에서 세탁기 배송이 되는 데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아직 가늠할 수 없어서 여전히 조금 걱정스럽긴 하지만 어찌 저지 해결될 일이다. 나이가 드는 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게 장점 중 한 가지다. 얼굴의 주름과 체력이 낮아진다는 큰 단점이 있지만 나이를 먹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음이 항상 20대에 머물러 있는 게 가끔은 단점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도 그리 나쁜 것 같진 않다.


내일은 아침 일찍 사고 바다를 걸어야겠다. 조이와 기분 좋은 이별의 시간을 마무리해야지. 아침 해를 함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벌써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이라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자자. 내일 아침은 비가 안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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