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AUG 2025
둘째의 얼굴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이젠 멀리서도 얼굴 홍조가 보였다. 초반엔 여드름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피부 상태로 변했다. 피부가 건조해져서인지 붉게 변한 부분에 하얗게 각질이 일어났다. 세안 후 로션을 바를 때마다 피부가 따갑다고 했고 건조해지는 피부 때문에 둘째는 얼굴 보습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한창 꾸미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인 둘째는 본인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다.
매일 아침, 둘째의 얼굴을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됐다. 어제보다 더 심해졌는지, 아니면 혹시 좋아지지 않았는지를 매일 체크했다. 어제와 크게 다른 점이 없나 싶다가도 며칠 전에 찍어둔 사진과 비교하면 확실히 상태가 나빠져있었다.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초기 치료시기를 놓쳐 병을 키우는 게 아닌가 불안했다.
병원에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다행인 건, 둘째가 학교에 잘 다녀주고 있다는 것, 잘 먹고 잘 자고 있다는 점, 심적으로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일을 통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학교에서 아무도 둘째에게 얼굴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다른데, 얼굴이 붉어져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한데,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둘째의 얼굴 변화를 그냥 지켜봐 주고 있다. 뉴질랜드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다. 둘째는 얼굴이 심하게 붉어졌지만, 여전히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고 방과 후 친구와 락 클라이밍도 즐기고 있다.
2주가 지났다.
둘째는 손등도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손등과 손가락 마디, 손톱 아랫부분이 먼저 붉게 변했다. 누르면 아프다고 한다. 증상들이 아무래도 루푸스 같다. 남편은 AI에게 루푸스에 대해 여러 가지를 습득하고 있었다. 남편이 전해주는 말을 들으면 불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정보를 습득하기보다는 둘째의 신체적 상태 변화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얼굴과 손이 붉게 변하고 손 주변 통증을 제외하면 다른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수요일, 영어 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한국은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늦게 잠을 자는 남편에게 이 시간은 아직 한밤중일 텐데, 급한 일이 있나 싶어 교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둘째 걱정에 잠이 깼다고 했다. 전 날, 우리는 둘째의 상태를 걱정하며 한국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언제까지 그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의견으로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불안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병원 예약부터 알아보고 다시 얘기하자고 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서울의 모 대학 병원 진료 예약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다음 주 수요일, 딱 일주일 후다. 남편은 떨어져 있어 아이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수 없으니 걱정이 더 많이 됐을 것이다. 피검사 결과와 의사 소견서를 꼭 지참해야 한다고 했다. 갑자기 모든 일이 급물살을 타면서 정신없이 바빠졌다. GP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 소견서와 피검사 결과지를 요청하니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한다. 이럴 수가. 도대체 빠른 게 뭐가 있는지, 아, 뉴질랜드! 내가 사정을 말하니 응급으로 부탁을 해보긴 하겠지만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혹시 몰라 남편에게 한국에서 빠르게 피검사를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병원 진료가 다음 주 수요일이니 토요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에 피검사를 진행하면 수요일 병원 진료에 큰 차질은 없을 것이다. 남편은 동네 자주 가던 소아과, 내과 병원에 피검사를 부탁해 놓았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학교를 길게는 3주 정도 빠져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당장 검사를 하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이제 가장 큰 난관이 남았다. 둘째에게 이 계획을 말해야 한다. 학교를 좋아하는 둘째에게 과연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둘째는 이 계획을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 있는 둘째에게 집에 일찍 오라는 문자를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편과 내가 만든 계획을 말했다.
예상대로 그 소식을 들은 둘째는 펑펑 울었다.
음.. 이렇게까지 학교를 좋아한다고? 잠깐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가 이만큼이나 좋았던 적이 있었나 생각을 더듬어봤다. 3주 정도 학교를 어쩔 수 없이(매우 타당한 이유로) 빠져야 한다면 나는 좋아서 웃음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펑펑 우는 둘째를 다독이며 학업보다 네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말로 설득을 시작했다. 둘째는 지금 시험기간 중이다. 다음 주에 시험이 3개나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시험을 못 보면 성적이 안 나오고 어쩌고 저쩌고…
음.. 자꾸 눈동자가 위로 올라간다. ‘이렇게 성적을 걱정한다고? 네가 언제부터!!’라는 생각을 하면서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은 공부보다 건강이 더 중요한 시점이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둘째는 3주씩이나 학교를 어떻게 빠지냐고 하소연하면서 배드민턴 동아리에 가지 못하는 것까지 걱정을 했다. 참나, 기특하면서도 어처구니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혼자 되뇌었고, 둘째에게 이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째는 그제야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듯했다.
‘학교를 3주나 빠진다고? 꽤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서 모든 일이 마무리됐다. 둘째는 내일모레 한국에 갈 것이다. 진료를 보고 치료약을 받게 될 것이다. 치료를 시작하면 다시 괜찮아질 것이다. 모든 게 다 잘 해결됐다. 학교를 길게는 한 달 정도 빠져야 하고 그 기간 안에 있는 모든 시험은 볼 수 없어 성적이 안 나오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뉴질랜드 번호다. 뉴질랜드 번호로 전화가 오는 일은 드물다. 친구들 번호는 모두 저장이 되어있기 때문에 저장이 되지 않은 번호는 스팸 전화이거나 혹은, 혹은, 혹시..
전화를 받았다. Public Hospital(공공병원, 3차 진료를 하는 곳, 우리나라의 대학병원과 같은 개념)이다. 둘째의 진료 날짜가 정해졌다. 다음 주 금요일.
어떻게 하루에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지, 운명처럼 한국행 비행기를 끊은 그날, 우리는 마침내 스페셜리스트를 만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어떻게 해야 할까. 피검사에만 NZ$1000가 들었기 때문에 스페셜리스트는 돈이 더 많이 들것이다. 한국으로 가 치료를 받는 것도 비슷하게 들 것이다. 아니 어쩌면 비행기 티켓, 병원비, 약값을 다 합쳐도 스페셜리스트 진료비가 더 비쌀지도 모른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방향을 정했다. 남편은 기왕 비행기 티켓까지 끊었으니 한국에서 치료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한국 의료 기술은 높은 수준이다. 뉴질랜드 의료 기술도 그렇겠지만 언어 장벽과 긴 대기 시간, 그리고 가끔 들리는 의료 서비스의 단점과 적절하지 않은 처치 등을 전해 들었던 차라 어느 정도 불안함은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학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과 앞으로도 뉴질랜드에서 몇 년 더 지낼 예정이기 때문에 접근이 쉬운 곳을 생각해 뉴질랜드에서 치료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석연치 않아 했지만, 내 의견에 동의했다.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둘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상황에 둘째는 또 한 번 흥분했다.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말할걸 그랬다는 생각을 잠깐 하면서 일이 해결됐다는 안도감과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10일의 기다림이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하루 동안 한국에 갔다가 몇 분 만에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온 둘째를 위로하기 위해 오래간만에 중국집으로 외식을 하러 갔다.
이제 딱 10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