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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아프면 생기는 일 3

25 Aug 2025

by 게으른 곰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지만 마음은 편했다. 이제 곧 의사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지만 진료 시 의학 용어가 많이 나올 것을 대비해 병원에 통역사를 요청했다. 나는 둘째의 병명이 루푸스 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모든 증상이 루프스 증상과 맞아떨어진다. 초반에 얼굴이 그리 붉게 변하지 않았을 때 미리 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GP가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피검사를 했어도 루푸스 양성반응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안한 긴 시간들을 지나 마침내 Specialist(전문의)와의 약속이 잡힌 것이다.


전문의를 만나기 전 일주일은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이미 한 달 반을 기다리고 있지만 코앞에 닥친 일주일은 비교도 안될 만큼 길게 느껴졌다. 둘째의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얼굴 홍조와 손등과 손목 위로 붉게 변한 피부가 점점 넓어졌다. 하루, 이틀,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수요일..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드디어 병원에 가는 날이다.


남편은 약속 장소에 항상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다. 버스나 기차표를 끊어놓고 출발 1시간 전에 터미널에 가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가끔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지나친 준비를 한다고 느껴졌다. 물론 늦는 것보다 미리 준비하는 게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만, 남편과 나의 준비 시간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남편은 이번에도 난리다. 병원에 늦지 않게 미리 도착하라는 조언을 몇 번이고 했다. 잔소리처럼 느껴져 알았으니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다음날이 되면 또다시 같은 소리를 내뱉고야 만다. 으... 불평 섞인 목소리로 남편을 나무랐지만 나도 나름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에서 처음 가보는 3차 진료 병원이니 일찍 출발할 예정이다. 병원 규모도 클 것이고, 사람도 많을 것이고 건물도 여러 개일 것이니 헤매는 시간을 포함해 넉넉한 시간 여유를 두고 가야 한다.


병원 가기 전 날, 잠을 설쳤지만 영어 수업에 참석했다. 12시 30분까지 진행되는 수업이지만 중간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둘째는 2교시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있었다. 그리고 12시, 우리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12시 13분. North Shore Hospital에 도착했다. 진료는 1시라 넉넉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주차를 하고 안내에 적힌 대로 메인 건물 3번 입구를 찾았다. 많이 헤맬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다르게, 건물은 주차장 바로 앞이었다. 병원 안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대학 병원을 종종 찾았다. 어려서는 아이들 때문에, 지금은 엄마의 진료 때문에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갈 때마다 병원은 북적였다. 건물도 커 진료실이나 검사실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가끔은 길을 잃고 안내센터에서 길을 물은 적도 있다. 병원 안엔 카페도 있고 매점도 있고 식당도 있다. 편의점도, 안경점도 심지어 서점도 있다. 이런 모습의 병원을 상상하면서 도착했는데, 병원 안이 썰렁하다.

우리 외에 내원을 하러 온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병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만 종종 관찰될 뿐, 텅 빈 병원에 나와 딸만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안내 데스크로 가 1시 예약을 위해 왔다고 말했더니 ‘오, 일찍 왔네?’한다. 그리고는 병원에 오기 전 신청한 통역사를 배치해 줄 것이라는 안내를 받고 진료실 앞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40분이 남았다.


08251.jpg 넓은 대기실에 우리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일찍 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처음 방문이니 급하게 서두르는 것보다 기다리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12시 50분쯤이 되자 드디어 사람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 1시 진료를 보러 온 사람들인가 보다. 아마 점심시간이 끝난 후 첫 진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1시가 됐다. 우리 진료를 맡아줄 Dr. Hugh가 12시 55분 진료실로 들어가는 걸 봤다. 이제 우리 이름을 부르겠지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5분이 지나고 1시 10분이 되도록 Dr. Hugh는 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진료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안내 데스크를 다시 찾았다.


‘내가 여기 처음 와봐서 그러는데, 그냥 기다리면 될까? 아니면 시간이 되면 진료실에 들어가야 해? 그리고 통역을 부탁했는데 아직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했어.’


라고 물으니 기다리면 이름이 불려질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청한 통역사에 대한 건 다시 알아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그녀가 Dr.Hugh의 방에 들어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더니 다시 나를 불렀다. 통역이 오늘 준비가 안 됐다는 소식이다.

괜찮다. 뭐, 어쩔 수 없지. 오늘 진료를 꼭 봐야 한다. 더 이상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통역이 없어도 괜찮다고 하니 다음번엔 꼭 준비를 할게.라는 말과 함께 우리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드디어 전문의를 만났다. 딸의 담당 의사 Dr. Hugh는 키가 크고 곱슬머리를 가진, 어딘지 조금 진지한 얼굴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Dr.Hugh는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고 딸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증상과 피검사 결과, 호흡 소리를 듣고 혈압도 쟀다. 딸의 증상과 예상하는 것들에 대해 말을 하다가 멈추고는 엄마에게 통역을 해주라며, 우리를 기다려줬다. 나도 얼추 의사의 말을 이해했지만 그의 배려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는 딸에게 처방한 약에 대해 긴 설명을 했다. 남편이 예상한 그 약을 처방받았다. 남편은 병원에 가기 전 루푸스에 대해 많이 알아봤다. 남편이 말한 약을 처방받았을 때, 남편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지어졌다. 각자의 자리에서 다들 애썼구나.


무려 30분의 진료 시간이 끝난 뒤 Dr.Hugh의 제안으로 피검사를 한번 더 진행하고 진료가 끝났다. 한국의 1-2분 진료 시간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차이다. 엄마와 병원을 찾을 때마다 늘 의사와 인사하고 이러저러합니다.라는 의사의 말을 간단히 듣고 진료실 밖에서 간호사와 함께 다음 예약 날짜를 잡았던 기억이 났다. Dr.Hugh는 친절하고 나의 영어를 배려해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어쩌면 다소 느리게 진료를 진행했다. 아마 이 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뉴질랜드 의사의 진료는 이럴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정확한 진단을 못해 병을 키우거나 오진으로 병이 악화됐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터라 전혀 다른 나의 첫 경험은 꽤 인상적이었다. 한국에 비해 의료 진행이 현저히 느리고 3차 진료 병원은 1년에서 길게는 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대부분 Public Hospitals: 공공 병원. 그 외 일부 사설 병원:Private Hospital 도 있다. 사설 병원은 주로 보험이나 개인 비용으로 이용한다.) 딸은 다행히 응급으로 진료를 보게 되어 3주 후 방문하게 된 케이스다. 병원 시스템에 의해 장단점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나의 첫 뉴질랜드 병원 경험은 좋은 인상으로 시작됐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피검사를 마치고 결제를 하기 위해 창구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해 다시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내가 결제는 어디서 할 수 있냐고 물으니, 직원은 갸우뚱하는 표정으로,

‘주차 요금 기계는 건물 밖에 있어.’라고 답했다. 나는 진료에 대한 결제라고 다시 물었다.


‘아, 진료는 무료야.’


‘?????????????????????’


잠깐 머리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아, 우리는 뉴질랜드 시민도 아니고 영주권자도 아니야. 내 딸은 유학생이야.’


그는 웃으며 그래도 무료라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GP를 만날 때도, 약국에서 처방된 약을 살 때도 Lab에서 피검사를 할 때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피검사를 하고 480달러를 결제했을 땐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전문의를 만나러 오기까지 총 1000달러가 넘는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나는 통장에 미리 예상되는 금액 이상의 돈을 준비하고 왔다. 그런데 무료라니.


몰랐다는 말과 함께 허둥지둥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 건네고 주차요금을 지불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알아보니 유학생도 경우에 따라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딸이 진단받는 루푸스는 응급 상황(장기 침범, 면역억제 치료 필요 등)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전문의의 관리가 필수이고 이는 보험, 비자 신분과 무관하게 진료를 제공하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이 말은 희귀병이나 중증 만성 질환의 경우로 포함 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다.

08252.jpg 무료 유방암 검사자에 해당한다는 안내문이 우편으로 날라왔다.

문득 며칠 전에 우편으로 온 유방암 검사 안내 편지가 생각났다.


나는 얼마 전 생일날 만 45세가 됐다. 그리고 생일이 지나고 3-4일 후, 집에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바로 유방암 검사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외국인이지만 뉴질랜드에서 2년마다 무료 유방암 검사를 할 수 있다. 누구나 이런 혜택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 사실은, 뉴질랜드는 자국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고, 뉴질랜드는 외국인인 우리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이번 일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길었던 기다림의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됐다. 약을 3개월치 처방받았고 약국에서 5달러를 결제했다. 역시 의료 혜택이 포함된 가격이다. 아직 피부과 협진 예약은 날짜가 잡히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다음 Dr.Hugh와의 진료는 9월로 예정되어 있어 두 번째 기다림이 진행 중이지만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둘째는 일주일 만에 많이 호전됐다. 앞으로 점점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될 만큼 눈에 띄게 회복 중이다.


걱정이 많았던 시간이 지나고 감사와 안정의 시간이 찾아왔다. 점점, 뉴질랜드에서의 삶이 편해지고 있다. 이제, 겨울도 막바지다.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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