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영향평가에 대한 논의
( ※ 이 글은 2020년 3월 26일자 국민일보에 기고된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왕초와 용가리>는 ‘안동네’라 불리는 영등포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동네 지킴이 왕초, 왕년의 건달 용가리, 술과 노래를 입에 달고 사는 복수, 성실함의 아이콘 진태, 그리고 ‘심상치 않은’ 많은 사람들. 영화는 이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재밌는 영화였지만 보는 동안 마음이 좀 불편했다. 화려한 타임스퀘어와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이토록 허름한 동네가 있다는 것이 불편했고, 욕지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의 험한 말투가 불편했다. 무엇보다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좁고 누추한 곳에서 ‘세계도시’ 서울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6890
가난은 그 존재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우리의 도시는 늘
그 가난을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몰아내려고 모의해왔다.
‘도시 재개발’이라는 근사한 이름은 바로 그 불편함의 근원을 없애버리려는 시도였다. 40년 가까이 우리나라에서 도시 재개발의 대명사였던 ‘합동재개발’은 변변한 대책도 없이 가난한 세입자들을 길거리로 혹은 또 다른 달동네도 내몰았다. 민간의 토지 소유자와 건설회사가 손을 잡고 개발하던 합동재개발에서 가난한 세입자들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망루를 쌓고 올라가서 목소리를 높였고 목숨을 걸고 전쟁 같은 투쟁을 벌이곤 했다. 그 결과 일부 주민은 턱없이 부족한 공공임대주택을 배정받기도 하고, 나머지는 약간의 이주비를 받고 또 다른 누추한 곳을 향해 가야 했다. 아파트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 더 많이 지어야 자기 몫이 커지는 땅 주인과 건설회사의 욕망, 뒷짐 지고 재빨리 도시 미관의 개선과 기반시설의 정비를 확보하려는 정부의 뻔뻔함, 그리고 더럽고 누추함을 불편하게 여기는 제3자의 무관심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모의의 결과였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 「연합뉴스」, 2012. 1. 17. https://www.yna.co.kr/view/AKR20120116179000004 2) 「연합뉴스」, 2020. 3. 23. https://www.yna.co.kr/view/AKR20200323069300004 3) 「연합뉴스」, 2020. 1. 20. https://fetv.co.kr/news/article.html?no=45600
얼마 전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LH, SH 등이 공공의 이름으로 이곳을 직접 재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의 합동재개발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다. 공공주택 특별법을 근거로 LH 등 공공이 토지를 수용해서 직접 개발하겠다는 거다. 분양 아파트뿐만 아니라 쪽방촌 세입자들이 거주할 영구임대주택도 짓고, 대학생, 청년, 신혼부부 등도 함께 살아갈 행복주택도 지을 계획이다. 그래서 쪽방촌에 거주하는 360 여명 모두를 임대주택에 수용하고, 임대료도 쪽방 임대료보다 훨씬 저렴하게 부담시키겠다고 한다.
주거운동에 관여해온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체로 이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필자도 공공부문의 이러한 시도를 환영하고, 이 사업이 정말 큰 성공을 거두길 바란다. 이 사업을 통해 우리 시대에 맞는 도시 재개발의 새로운 모델을 한번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기서 살아가는 쪽방촌 사람들과 지역사회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먼저 그들의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 추위와 눈비를 막아 줄 집, 따뜻한 물과 깨끗한 화장실, 그리고 저렴한 월세. 적어도 물질적인 측면의 조건들은 어느 정도 충족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왕초와 용가리>에서도 잘 드러나듯 그들에게는 북풍한파와 냉골보다 사무친 외로움이 더 견디기 힘들지 모른다. 안동네에서 길 하나만 건너가면 고시원들이 있다. 월세를 약간만 더 내면 그들은 추위를 막아줄 시설과 따뜻한 물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안동네를 떠나 고시원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한경수 피디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말한다. 영등포 재개발 사업이 성공하려면 번듯하지만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어울림이 가능한 공간이라야 한다. 그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복지단체와 사회단체의 도움도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개발 과정에서 이러한 주민들의 소요를 제대로 파악해서 사업의 내용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토지 소유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당장 쪽방에서 벌어들이던 월세 수입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합동재개발을 통해 벌어들일 미래 수입이 사라진 것에 대해 반발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들 중 일부는 외부에 살면서 쪽방에서 들어오는 월세 수입을 누리는 ‘빈곤 비즈니스’ 업자들이다. 또 다른 일부는 그들 자신이 쪽방에서 사는 주민으로서 별다른 수입 없이 월세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모두 뭉뚱그려서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하지 말고 세심한 접근을 해야 한다. 재개발사업이 이들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영등포 재개발 사업이 성공하려면 이 사업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이러한 다양한 영향들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좋은 점은 모범을 만들어서 다른 지역사례에도 전파하고, 부족한 점은 영향을 저감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쪽방촌 주민들과 집 주인들, 이 지역에서 활동해온 많은 시민단체들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서 필자는 <지역사회영향평가>를 함께 진행할 것을 제안한다. 환경영향평가가 개발사업으로 인한 자연 생태계에 대한 영향을 평가하여 문제를 저감하듯, 지역사회영향평가는 재개발 사업으로 인한 문제를 사전에 파악하여 이를 최소화할 방안을 사업과정에 반영하는 과정이다.
도시를 살기 좋게 만드는 일은 선한 의도만으로 되지 않는다.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영등포 쪽방촌 재개발 사업이 처음에 의도했던 선한 목적을 달성하여 도시 재개발의 성공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과정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역사회영향평가가 사업의 과정을 다소 복잡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사업 진행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줄이고 결과적으로 사업기간도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부디 이 사업이 성공하여 우리나라 도시 재개발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