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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현 Jan 04. 2023

꼰대의 필요충분

서울시립미술관, 키키 스미스,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

<메두사>(2004)


전시정보


전시명ㅣ<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

작가ㅣ키키 스미스(Kiki Smith)

전시기간ㅣ2022-12-15 ~ 2023-03-12

장소ㅣ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관람료ㅣ무료




시나브로 시나브로 퇴화하는 우리의 신경은, 그동안 진화를 거듭한 기계의 회로와 낱낱이 같은 모양이  것으로 믿곤 한다. 인간다움의 묵시록,  도중 페이지에 있으나 그것이 펼쳐진 사실에조차 무신경한 세상이다.


궤변들이 거리에 진 낙엽들처럼 뻔뻔히 굴러다닌다. 굴러다니도록 두는 이유는 단연 그것들이 궤변인지를 몰라서이다. 궤변일지도 모를 말들을 양산함의 이유는 신경써보지 않은 것을 그냥 판단함에 있다. 너무 일상적인 나머지 더 신경쓸 여부가 없다 여기는 것들에 대한 고집어린 판단에서 우리 생각보다 훨씬 자주 폭력성이 속출한다. 세상에 피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에서 당연하다 여겨지는 무엇에도 그 생로병사가 다단히 있다. 그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나비, 박쥐, 거북이>(2000) 중


늘 같이 있으면서도, 상당 순간 본질을 실로 무시받는 주체이자 객체가 바로 우리의 신체, 몸이다. 몸이란 언제나 필수적인 물리 조건이자 인식 대상이며, 존재의 주요 기반이다. 모든 행위의 발산지이자 매개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몇몇 ‘주요’ 기관을 제외한 몸의 요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화 되고 은폐화 되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자기 존재 기반이라는 이유로, 몸을 구태여 분절화하고 자세히 마주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 어떤 요소는 불쾌하거나 비위생적으로 여겨 먼저 외면한다.


1990년대 미국 애브젝트(abject)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 키키 스미스(Kiki Smith)는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생명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에 대해 숙고하고, 신체의 파편화를 영감삼은 창작 활동을 전개한다. 큰 사고 이후 끔찍한 고통을 자기 신체의 캔버스 안 분절로써 승화시켰던 프리다 칼로(Frida Kahlo)나 죽음의 심연을 일생동안 곁에 두며 존재론적 불안과 광기, 질병을 형상화 했던 에두바르 뭉크(Edvard Munch)만큼이나 스미스는 매우 전복적이고 계몽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친다. 신체에 대한 해체적이고 파편화된 탐구를 통해 안과 밖을 집요하게 오가며 신체 요소에 대해 천착한다. 인체에 대한 많은 표현들이 분절되어 있으며 특히 땀, 생리혈, 눈물, 정액, 소변 등의 신체 분비물까지 가감없이 다루며 신체에의 비위계적 태도를 주창한다.


<탄생>(2002)


 애브젝트란, 매혹과 반감이 공존하는 불쾌한 대상이자 모든 주체의 정체성과 통일성, 체계, 질서를 무시하고 위협하는 중간적인 것, 모호한 것, 복합적인 것으로서 주체가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억압하고 밀어내야하는 존재*이다. 예시로는 음식물, 구토, 오물, 피 등이 있다. 신체는 역사적으로 꾸준히 애브젝트화 되어 왔다. 이를테면 여성 신체의 형상은 특정 상징화 되어 성적 이상, 지배 이념의 미학이 투영되는 타자화된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월경혈은 오염과 금기의 혐오 대상으로써 은폐화되며, 성별 자체에 대한 혐오 표현으로 전락한 바 있다.


스미스의 <라스 아니마스>(1997)에서는 과거 작품 속 흠 없이 이상화된 여성들과는 달리, 털, 주름, 핏줄, 모공, 상처 등을 확대하여 의도적으로 강조한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미술의  재현 방식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이렇듯 스미스는 몸을 재인식하며 이미지에 해부학적인 접근을 통해 기존 심미적 관점을 철처히 전복하고자 했다.


<라스 아니마스>(1997)


“자연스러워 알아채지 못했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명제가 선선히 떠올라있는 세상이 진정 궤변이 고개를 들지 못하며 개인에게 안온한 세상이 될 것이니,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면 당연한 것을 되돌아보고, 그것의 변증도 엄연히 존재함을 신경 써라. 삶에 치여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적어도 신경 쓰지 않은 만큼 침묵해라. 말마따나 에너지의 총량이 있다면, 술자리에서 우쭐대며 경솔해지는 그 에너지를 아껴야 맞지 않은가.


<소화계>,1988



*이문정(2012), 「여성 미술에 나타난 애브젝트abject의 ‘육체적 징후’somatic symptom와 예술적 승화」, 『현대미술사연구』 제 32집,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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