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가족 곁으로 돌아오라고 만든 명절이라는 의례를, 난 늘 정답게 여겼다.
그치만 어릴적 몸을 부대끼며 같은 시간의 흐름에 올라타있었다가, 홀로 내려와 다른 시간에 올라타면서부터는 식구들과의 조우가 소나기 같다.
이렇다할 복잡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도, 볼때마다 너무 많은 게 변해있고 그것을 아무도 새삼스레 여기지 않는 기류 때문에 섬에만 국지적으로 내리는 소나기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서 괜스레 서글퍼지는 변화들이 많지만 그 외 벌어졌던 가족사들은 밥술을 뜨기 전 할머니의 기도를 통해 요약된다. 어떤 일이든 가족에게 좋고 나쁜 일로 분리하여 축복을 빌거나 구원을 빌기때문에, 평소 더할일없이 온화하고 느슨한 할머니가 가장 치열하고 성미있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지만 기도의 효능에 대해서 따진지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기도하는 열성 그 자체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나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살다가 깨우쳐지는 건 결국 무능과 불능뿐. 어느 것도 뜻대로 되지 않으며, 행복에 매달릴수록 수반되는 것은 고통이다. 죄가 없거나 악하지 않은 이에게도 불행과 비극은 보란듯 찾아오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연에 매번 속아넘어가 애통해하는것이 인간이다. 차돌처럼 단단한 그 법칙은 결코 부서지지 않기에, 그저 도리없이 무엇을 믿고 의지하기로 선택하는 것, 그렇게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기도일테다.
있어야 할곳에 없었던 것, 남겨진 사람을 잡아야 마땅했을때에 떠나는 사람을 잡았던 것, 본능적으로 고통을 회피하거나 원하는 것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여 좋은 때를 놓쳤던 것. 이것이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이자, 기도의 재료일것이다. 주기도문을 외듯이, 여러 개의 액자로 그 변증법을 되새긴다. 삶의 광포한 허무함을 버텨내도록.
명절 연휴의 밤, 짧게 나마 눈을 감고 기도했다. 지켜낼 것, 이룰 것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서. 일말의 낯뜨거움도 없는 과잉된 간절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