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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고집 Oct 01. 2024

마음의 풍경화 (風景化) 1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눈앞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책상위의 서류들은 알아서 파일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사무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모래 먼지가 흩날리는 몽골의 아득한 사막에 홀로 서있다. 방향감각을 잃은 채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기대했던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졸업 후 동기생들보다 먼저 승승장구해 왔는데 딱 거기까지 였다. 이번엔 편법과 임기응변에 강한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 올라탔다. 구토가 났다. 성실함에 대한 신뢰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세상은 늘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소중한 가치 하나가 셔츠의 단추처럼 툭 떨어진다. 몹시 아끼던 친구를 한 순간에 잃은 듯하다.


​ "오늘도 늦니?"
"네"
엄마의 전화가 어깨를 툭 친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이 나온다. 만약 '언제 오니?'라고 물었다면 마지못해 '곧 들어가요'라고 했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마음은 변한다. 그림자처럼 상황도 흔들린다.
'이대로는 견딜 수 없어.'
집으로 가기 전 어디에선가 흙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엄마는 늘 낯빛을 살핀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나를 진정으로 믿고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 엄마를 슬프게 하는 일이다.
‘어디로 갈까.’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불교회 선배다. 오늘 저녁 특별기도 모임에 오라고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네" 라고 대답하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이동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플라타너스 잎이 살랑이며 마음을 흔든다.
'가지 말까?‘
내 안의 어둠이 꿈틀거리며 속삭인다.
‘이런 날엔 어두컴컴한 영화관이 제격이야.’
번데기처럼 의자에 푹 싸여 몸을 숨기고 싶다. 그러자 S극장이라는 팻말이 달린 버스가 귀신같이 눈앞에 다가온다. 너무 놀라 흠칫 물러선다. 온 우주가 보이지 않는 마음을 주시하고 있다.

이왕 들킨 김에 상영작을 찾아본다. 로맨틱 코미디와 SF 일색이다. 느리고 잔잔한 멜로에 젖고 싶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다시 온다면 어떨까. 심은하가 분노로 유리창을 깨뜨리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반응할 것이다. 죽음을 앞둔 한석규의 절제된 미소는 영화를 보는 내내 뼈아프게 사무친다. 그가 기운없이 흥얼거리던 '거리에서'는 내 오랜 소울메이트다. 그 곡이라면 마음 한 켠을 어루만져줄 것이다. 단 몇 조각의 찬란함, 내 영혼이 숨 쉴 만큼이면 된다.
'조용히 기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다시 마음을 돌려 우이동행 버스를 탄다.
'카타르시스가 필요해'
어쩌면 나보다 더 나락에 빠졌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순화되니까.

​ 버스에서 내릴 즈음 문득 옷을 내려다보니 한숨이 나온다. 하필이면 지난 번 모임에 입었던 바로 그 옷이다. 자색 꽃무늬 셔츠에 흰 바지라니. 코드에 맞지 않아 몹시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그냥 가지 말까?'
또다시 마음이 요동친다. 그때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앞에 서있던 여학생의 손에 든 냉커피가 출렁 내 바지로 쏟아진다.
"죄송해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손짓한다.

'어쩌겠어요, 내가 자초한 일인데.'
일단 손수건으로 정리하고 황급히 버스에서 내린다.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눈이 온다면....'
눈 덮인 들판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어린 날의 나, 분별심 없던 그날들을 소환한다. 어느새 어둠이 눈 내리듯 내려앉는다. 폭설로 나를 뒤덮을 때까지 천천히 오래 걷는다. 눈 내리는 밤의 산책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다.

현관에 들어서자 엄마는 내 얼굴부터 살핀다.
"힘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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