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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Sep 28. 2022

생명의 지형도

[국립현대미술관] <문신(文信):우주를 향하여> 전시형식비평

작가에게 '우주'는 그가 평생 탐구했던 '생명의 근원'이자 '미지의 세계',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고향'과도 같다.

<문신(文信):우주를 향하여> 전시 소개문 中


01.


모든 전시장이들의 최전선은 높고도 견고한 불통(不通)의 성벽이다. 이 불통의 벽 너머로 한 토막의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소박함이 전시장이들이 그리는 이상이다. 때문에 전시장이들이 전시를 준비하는 때에는 어떤 의미를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비등한 무게로, 어떻게 그 의미를 불통의 성벽 너머로 날려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유형의 전시들에 비해 유난하게도, 현대미술을 내용으로 다루는 전시의 경우에는 이 성벽을 공략하는 절대적 방법이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바로 작품 발화 그 자체가 불통의 성벽을 공략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무기라는 오래된 미신이다. 이러한 믿음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정량적으로 증명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엘릿트' 신자들에 의해 꾸준히 주장되어오고 있으며, 이러한 믿음의 교회를 현실에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 바로 현대미술관을 '화이트큐브'로 존속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다르지 않다.



02.



60평 규모의 하얗고 밝은 방. 그 방 한가운데 우뚝 선 네모난 전시대. 그리고 그 위에 정갈히 늘어선 '개미'연작을 바라보는 경험을 상상해보자. 하얀 방은 작품의 윤곽을 더 또렷이 드러낼 것이고, 작품을 때리는 조명은 작품의 매끈한 피부에서 관능적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이를 조용히 관조하는 것은 분명 매혹적인 미적 경험이다. 하지만 과연 미술관에 방문하는 대중 일반이 이러한 표면의 매끄러움을 뚫고, 작품의 유전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화이트큐브' 모델의 전시형식에 대한 믿음 역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신(文):우주를 향하여>는 현대미술전시가 단순히 '화이트큐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관점을 자신감 있게 드러내 보인다. 이 전시에서 '공간'은 단순히 작품의 감각적 특질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술작품을 중심에 둔 주체적-해석적 전시 경험의 조건을 형성하는 능동적 장치로 규정된다.


곡선을 그리는 벽체와 전시대, 그 위에 올라 선 수십 개의 조각들. 이 독특한 전시의 형식은 개개의 작품들을 ‘생명의 근원 - 우주'에 대한 탐구라는 거대한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곡선형 전시대 위에 임의적으로 놓인 작품들은 우주의 거대한 흐름 위에 피어난 강인한 생명들처럼 보인다.


전시실에서 마주하는 작품 개개의 감각적 특질들 - 대칭을 이루는 복곡면 덩어리와 시선이 미끄러지는 표면의 질감 - 은 관람객의 눈길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이 작품들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새빨간 페라리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를 매료한다. 하지만 전시의 형식이 작품의 특질들을 갈무리하여 맥락 화하기 때문에 관람객은 작품의 표면에 매몰되지 않고 작품의 존재적 맥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공간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가가 천착했던 골몰함의 궤적을 따라 그의 심상세계 그 자체를 탐구하도록 손짓한다.




03.


전시는 한 권의 책, 한 편의 글과는 다르다. 전시는 근본적으로 공간을 경험의 조건으로 삼는 특수한 소통의 형식이다. 전시장 한 편에 붙은 월텍스트만으로 전시에 대한 전시기획자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러한 형식적 다름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에서 비롯하는 오류이다. 텍스트가 정보를 나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시공간 역시 그 자체로 독자적인 매체로서 기능한다.


학예사는 텍스트를 통해 작품의 맥락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전시디자이너는 공간의 형식, 즉 관객이 작품과 맺는 공간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그 맥락을 드러낸다. 이는 언어적 소통과는 구분되는 공간적 소통의 형태이다. 이러한 형식은 때로는 생각의 방향을 넌지시 제안하고, 상상력을 경쾌하게 자극하기도 하며, 관람객의 해석을 부드럽게 권유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때문에 전시 공간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이해하고 적극 활용하는 것이 더 즐겁고 유익한 전시경험을 이끌어내는 일로 이어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문신(文信):우주를 향하여>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선보이는 여러 기획전시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 형식적 시도가 시사하는 바는 그 외연을 훌쩍 넘어선다. 전시실 전반에 드러나는 소통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과 시도, 그리고 그 성과들은 모든 뮤지엄들이 고민해야 하는 다양한 차원의 화두들을 훑는다. 전시디자이너는 공간의 가능성을 깊게 탐구하고, 미술전시에 만연한 관성에 경종을 울린다. 이러한 시도 끝에 탄생한 전시는 대중과 미술의 새로운 소통관계를 정의한다.


전시를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시도는 반가운 것이다. 이 새로움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관성을 눈앞에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발판 삼아 그동안 관성적으로 답습해온 형식들이 지금 이 순간에, 그리고 앞으로도 유용할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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