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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할망 Jun 10. 2024

잘도 착허다.

현재를 잊고 자꾸만 타입슬립을 떠나는 그녀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언젠가 그녀의 그 과거마저도 잊히지 않을까 하는 허전함을 위해그리고 그녀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나와 내 가족들의 위안을 위해그녀와 함께 타입슬립을 떠나기로 하다.



얼마 전 일본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버지 상태가 의심스러워 치매 검사를 하게 되었고 결국 5등급을 판정받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주간보호 센터를 어디로 보내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동생과 언니들이 의논하고 있는데 너희 어머니가 다니는 데는 어떠냐고. 멀리 있는 죄로 형제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못 돼 맘이 좀 그래서 정보라도 알려주고 싶어 그런다고.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 만나면 대화의 시작과 끝이 대부분 부모님 얘기다. 다들 부모님 연세가 80을 넘기시거나 아무리 젊어도 70대 후반 정도이니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 한두 개는 필수이다. 좌골신경통으로 침상에서만 누워지낸다, 의치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잇몸이 많이 상해서 유동식만 드신다, 변기에다 자꾸 뭔가를 넣는다,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등. 부모님들의 이상 행동 베틀을 이어가다 보면 선뜻선뜻 놀라다가도 눈물이 또르르또르르 흐르게 된다. 조금 과장하면 부모님의 건강 상태가 양호할수록 50대인 우리들의 행복지수가 높다.       


친구들과의 진한 대화와 몇 권의 치매 관련 책으로는 홍 여사의 이상 행동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결국 치매요양보호사 교육을 신청했다. 보건소 치매안심센터에서 치매 가족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치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저녁마다 전화(약이 어디 있는지 거의 매일 전화가 온다)를 걸어오는 홍 여사에게 당분간은 저녁에 통화할 수 없다고 반복해서 설명드렸다.      


“허라허라. 나이 이신디도 또 공부허켄허난 잘도 착허다. 너넨, 아방이 그추룩 먹엉 석어도 다들 공부도 잘허고 착해나서. 나가 경허난 살았주. 먹엉 오는 날은 옥상에도 숨었당, 서녁집 담장도 넘었당 해신디...” ((공부)해, 나이 들어도 또 공부한다고 하니 정말 착하네. 너희는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셔 행패부리고 해도 다들 공부도 잘하고 착했어. 내가 그래서 참고 살았지. 술 먹은 날에는 옥상에도 숨었다가, 서쪽 담장을 몰래 넘어가기도 했었지.)      


홍 여사와 그녀의 딸아들은 기가 막히게 잠귀가 밝은 편이다. 이들이 그리된 건 고인이 된 그녀의 남편이 술에 취해 귀가할 때마다 벌이는 이벤트 덕이다. 잠결에도 술 마시고 귀가하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면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몸을 숨겨야 하는지 판단해야 했다. 주기적으로 깨졌던 안방 유리창은 네 개가 모두 다른 무늬였고, 손에 들기 쉬운 가전제품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었다. 가장 피해가 심했던 것은 홍 여사였고, 한밤중에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상처를 꿰매거나, 몇 날 며칠 동안 피멍을 달래며 지내는 시간이 누적되었다. 사춘기가 극에 달한 그녀의 딸 중 하나가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치러지는 이벤트를 견디지 못해 손목에다 몹쓸 짓을 했다. 허무하게도 다음날 아침 피 묻은 이불 위에서 눈을 뜨고야 만 딸은 언제나처럼 학교에 갔고,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한밤중의 숨바꼭질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요양보호사 공부를 시작할 거라는 내 얘기를 듣고 시작된 홍 여사의 옛이야기는 곽지(그녀의 남편 고향인)에서 양장점을 열지 않았더라면, 일본으로 밀항하려 했던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그를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푸념으로 이어졌다. 

“엄마, 경해시믄 나도 안 태어나고, 이추룩 나영 밥도 못먹고 아픈 엄마 못돌봐주고 해실건디? 경해도 나 이시난 좋지 안해?”

(엄마, 만약 그랬다면 나도 태어나지 않았고, 이렇게 나랑 밥을 먹거나 아픈 엄마 돌봐주거나 하지 못했을 텐데? 그래도 지금 내가 있으니까 좋지 않아?)     


“엄마 베토벤 알아?” 남편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더 북받치기 전에 얼른 화제를 바꿨다. 홍 여사에게 베토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에 나오는 한 장면을 얘기해 주었다. 깜깜한 밤거리를 따라 휘청거리는 한 남자가 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그의 검은 그림자는 긴 막대를 손에 불끈 쥐고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방 안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어린 베토벤은 잠시 주저하더니 창문을 열고 잠옷 바람으로 밖으로 도망친다. 하얀 잠옷이 자유롭게 흔들거리고, 잔잔한 호수에 이르자 주저 없이 물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물 위에 떠있는다.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별이 된 어린 베토벤의 얼굴에는 환희의 미소가 맴돈다. 아버지의 폭행의 기억은 “환희의 송가” 연주에 묻힌다. 소리 없이 멀어지는 별. 베토벤이 아버지에게 너무 맞아서 청력을 잃게 된 것 같다는 얘기를 듣던 홍 여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홍 여사는, 자해를 시도했던 그녀의 딸은 별이 되고 싶은 베토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교육이 시작된 후로도 저녁마다 홍 여사의 전화가 이어졌다. 쉬는 시간에 홍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왜 전화했었는지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수업받는 중이었다고 설명하면 ‘아~~맞다, 알았어’ 하고 속삭이며 얼른 끊는다. 교육 과정이 끝날 때까지 당분간은 오밤중에 숨바꼭질 같은 전화 놀이가 이어질 것 같다.      



<베토벤의 사랑을 그려낸 명작 "불멸의 연인" 과 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는 아래 영상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2V_gdwBI904&t=35s

https://www.youtube.com/watch?v=dZdcIctiZ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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