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잊고 자꾸만 타입슬립을 떠나는 그녀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 언젠가 그녀의 그 과거마저도 잊히지 않을까 하는 허전함을 위해, 그리고 그녀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나와 내 가족들의 위안을 위해, 그녀와 함께 타입슬립을 떠나기로 하다.
2023년 12월 28일, 홍 여사가 혼디사랑요양원에 다닌 지 한 달이 지났다. 지난봄만 해도 외출하기를 꺼려 했던 터라 치매 등급을 받고도 주간보호 센터에 다니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걱정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찾아오는 요양보호사의 짧은 돌봄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 억지로라도 주간보호 센터를 다니도록 하고 싶었다. 집밖에 나가지 않겠노라고 고집부리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언니와 나는 너무 오랫동안 차를 타지 않고, 도심지보다는 자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을 찾아 제주도 내 주간보호 센터를 꼼꼼히 검색해 나갔다.
햇빛이 찬란했던 어느 가을날 오전, 장고 끝에 언니와 함께 찾아갔던 그곳은 마치 봄 햇살이 드리운 듯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원장님을 비롯해 사무장님과의 짧지 않은 면담, 어르신들의 체험활동 모습,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부대시설 등을 예리하게 훑어나갔다. 몇 가지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라는 감상평을 쓰게 한 결정적인 한 방은 바로 남쪽으로 나 있는 큰 창문이었다. 심지어 창문마다 나비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있었으니, 홍 여사가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나와 함께 나비 관찰을 갔던 일을 떠올릴 수도 있겠구나 싶은 나비 효과를 기대해 봄 직했다.
사실 그동안 집 밖 외출을 멀리 한 홍 여사는 한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않거나 문을 걸어 잠그다 못해 어둑어둑한 커튼까지 단단히 쳐둔 채 내내 침침한 집 안에서만 지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이곳처럼 밝고, 환하고, 따사로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뭔가를 꼭 하지 않더라도 늘 우울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필 거라는 희망이 솟아났다. 우리들의 마음을 노곤하게 풀어준 그날의 가을볕은 결국 언니와 나로 하여금 홍 여사를 이곳으로 등원토록 하겠노라는 계약서를 쓰게 만들었다.
오전에 드셔야 하는 약을 센터에서 전담해 주신다 하니, 아침마다 홍 여사 집을 드나들었던 우리들의 짐도 덜어진데다 전문가 선생님들이 계시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 없겠다는 안도감에 그날은 오랜만에 두 발 벋고 편하게 잠을 잤다. 등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심각한 요실금 증상이 며칠 이어졌고, 저혈압성 쇼크가 생겨 급하게 혈압약을 바꿔야 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다 혈압약 가지고 와라, 일하는 데(요양원을 홍 여사는 일하는 곳으로 알고 있고 어떤 때에는 일하는데서 돈은 안 준다며, 왜 안주냐고 물어본다고까지 한다.)에는 약이 없다는 전화를 걸어오고 있다. 하지만 아침마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정해진 시간에 대문 밖을 나가 요양원 차를 타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요양원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균형 있는 식단이 홍 여사의 치매 지연에게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한 달 내내 실내에만 있는 것(있게만 하는 것)이 무료할 수도 있기에 한두 주에 한 번은 부러 결석하게 하고 있다. 그날은 나와 함께 텃밭에 가서 소일거리도 만들고, 주기적으로 가야 하는 병원에도 가고, 대형마트에서의 쇼핑(이젠 카트를 미는 일을 당신의 소임으로 생각할 정도다), 사우나에서 떼밀기, 숲길이나 절길 따라 걷기 등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물론 그럴 때마다 몇 번을 들었는지조차 셀 수 없는 옛날이야기가 반복되고, 그러다가 가끔은 어린애처럼 순박하게 웃거나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헉헉대며 지쳐하며 각양각색의 치매 어르신의 레퍼터리를 선보인다.
엊그제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던 동짓날 절 나들이(물론 팥죽을 먹을 요량이었지만)가 못내 아쉬워 가을에 은행나무를 보러 갔었던 관음사를 다시 찾았다. 교통상황 CCTV를 확인하니 도로는 제설이 다 되어 있기에 눈이 많이 녹았으려나 했는데 예상외로 하얀 눈이 제법 남아 있었다. 흰머리 흩날리는 두 여인이 마치 눈밭을 뒹구는 강아지들 마냥 추위를 잊은 채 엎어지고 푸더지면서(넘어지다의 제주 방언) 절터를 누비고 다녔다. 대웅전에 들어가 절도 하겠노라 해서 절에서 절하는 법을 알고 계시나 싶었지만, 방석을 마련해 드리니 삼배를 거뜬히 마무리하셨다. 홍 여사가 절을 다녔던 기억은 전혀 없는 터라 좀 의아해하던 찰나에 “덕분에 감사합니다!!”라고 속삭이듯 부처님을 향해 내뱉는 홍 여사의 한 마디가 범종의 울림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사실 홍 여사는 어린 시절 일본으로 밀항을 꿈꾸다가(?) 장흥포 어딘가에 있는 절집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다 한다. 당시 제주에서는 대나무를 실어 거제도 장흥포로 향하는 배가 있었고, 배에 실린 대나무 아래에 숨어 있던 홍 여사와 그 일당은 포구에 이른 뒤 어찌어찌 부산까지만 무사히 당도하면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몰래 탈 예정이었다고. 그러나 부산에서 출발 예정이던 배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어른들은 창살(이 대목에서 창살을 꼭 빠뜨리지 않는다) 있는 감옥에서 며칠을, 어린 홍 여사는 감옥 밖에서 며칠을 보낸 뒤에 다시 제주로 돌아왔단다. 어린 소녀의 마음에도 일본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게 될 꿈 하나로 어른들 틈에 끼었을 테니 그날의 실패담을 아~~ 어찌 잊으랴.
지금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장흥포 인근 절에서의 향냄새와 나직하게 흘러나왔을 진언, 그리고 한 톨 남김없이 먹었던 절 밥 등은 아직도 그녀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해 있다. 그래서인지 언제든 진언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절에 가는 것도 ‘참’ 좋다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과 그날 그 절집에서 함께 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하얗게 눈이 쌓인 관음사 야외에 모셔진 미륵불 앞에 이른 홍 여사는 “경림아 보고 싶다!!”라며 사촌 여동생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그날의 기억을 다시 소환했다.
일주문을 나오며 눈 쌓인 “덕분에 감사합니다!!”, 걸을 수 있는 홍 여사 “덕분에 감사합니다!!”, 잊지 못하는 기억 “덕분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감사합니다!!”라고 주문을 외며 삼배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