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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할망 Apr 03. 2024

네 번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현재를 잊고 자꾸만 타입슬립을 떠나는 그녀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 언젠가 그녀의 그 과거마저도 잊히지 않을까 하는 허전함을 위해,

그리고 그녀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나와 내 가족들의 위안을 위해,

그녀와 함께 타입슬립을 떠나기로 하다.


“엄마, 이따 9시에 텃밭 가서 양파 심고 오자.”

커피와 주전부리를 챙기고 약속한 시간에 맞춰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새빨간 재킷을 입은 홍 여사가 2L짜리 생수를 들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홍 여사와 함께 병원, 텃밭 나들이, 외식 등을 하기 위해서는 약속 당일 한 시간 전에 알려드려야 한다. 특이했던 어제의 일상들만 간혹 기억할 뿐(예를 들어 언니랑 어제 부두에 갔다 왔다는......), 시간과 요일에 대한 개념, 즉 시간 지남력은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그나마 ‘텃밭에서 일할 때 마셔야지’라는 ‘생각’을 해내신 것이 감사하다.     


‘지남력’이란, 과거 및 현재를 비롯하여 시간, 장소, 사람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남력은 뇌의 각기 다른 영역에 나타나는 여러 분야의 정신 활동들에 의해 결정된다. 지남력 손상은 주의집중, 기억력 장애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Lezak, 1995). DAT 환자(알츠하이머성 치매환자(Dementia of the Alzheimer’s type)들은 초기에는 시간에 관한 지남력이 상실되었다가 점차 증상이 진행될수록 장소와 사람에 관한 지남력이 감소하게 되는데, 특히 시간에 관한 지남력은 주의력과 기억력 장애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Park, 2006).     


홍 여사가 치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던 2023년 6월부터 대한치매학회 홈페이지(https://www.dementia.or.kr/general/)를 비롯해 도서관에 들러 치매 또는 인지 장애에 관한 책들을 대출해 속사포처럼 읽어나갔다. 덕분에 내 머리와 가슴과 눈가에 맴돌던 강한 상심과 낙심, 부정, 안타까움, 자책 등을 비교적 쉽고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홍 여사의 다른 자식들에게도 이젠 우리들의 삶이 정상적일 수 없을 것임을 예고했고, 전에 비해 홍 여사를 위한 시간과 노력을 더 쓰지 않으면 안 됨을 선포했다. 물론 나의 선포 방식과 각자가 쏟아내야 할 ‘시간과 노력의 양과 질’에 대한 의견 차이로 속앓이를 하기는 했지만......     


<진단을 통해 치매를 확진 받았다면 혼란과 거부, 부정, 분노, 원망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념’의 단계로 빨리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 병이 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부터라도 병을 제대로 파악해 환자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가겠다고 결단하는 수밖에 없다.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이미 병은 시작되었으니, 최대한 서로의 고통을 줄이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치매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엄마의 공책, 이성희·유경>     



홍 여사의 자녀들은 나름의 돌보미 역할 분담을 한 지 석 달을 넘겼고, 그 사이 홍 여사는 여러 차례의 병원 검사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등급판정위원회 위원과의 면담 등을 거쳐 장기 요양 5등급(치매 5등급)을 통지받았다. 장기 요양 5등급의 혜택은 “장기 요양기관이 운영하는 요양 병원을 제외한 노인 의료복지시설에 다니면서 신체·인지 활동 향상 등을 위한 교육을 받거나, 가정이나 재가노인복지시설에서 신체활동이나 인지 활동, 가사 활동 지원 등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바깥에 나가기를 내켜 하지 않는 홍 여사에게 가장 효과적이면서 부작용이 덜한 것은 무엇일까?     


<2017년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세상에 퍼뜨릴 만한 아이디어’를 알린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세계적 강연회)에서 리사 제노바 Lisa Genova(1970년생. 미국의 뇌과학자이자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만약 우리가 84세까지 살아남는다면 같은 나이의 사람들 중 2명에 1명은 알츠하이머병이고, 다른 한 명은 알츠하이머병의 간병인이다. - 뇌과학자의 엄마, 치매에 걸리다. 노조 아야코>

   

한 달하고도 일주일 동안 치매약을 복용해 오던 홍 여사가 어느 날 속옷에 실수(변실금)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리셉트(치매 증상의 치료제)의 부작용 중 하나가 무른 변을 볼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한 달 가까이 아무 일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럴 수 있나 싶었다. 하루는 변실금을 했는지 바로 알아채지를 못해 변이 묻어 있는 옷을 몇 시간째 입고 있거나, 또 다음 날은 실수한 옷을 빨지도 않은 채 건조대에 널어놓는(아마도 빨았다고 생각했으리라) 등 예상치도 못한 돌발 상황까지 이어지자 병원 주치의에게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복용해 오던 약을 3~4일 정도 끊은 후 5일째부터 1/2로 용량을 줄여 복용하도록 처방을 바꾸어 주었지만, 1/2로 용량을 줄인 후 다시 일주일 만에 변실금 증상이 재발하면서 결국 패치(하루에 한 번씩 위치를 바꿔가며 등에 붙이는 100원짜리 동전 크기의 동그랗고 투명한 패치) 형태로 바꾸기로 했다. 제발 이번엔 무탈하기를......     



토실토실하게 익은 고추를 따고, 올망졸망한 것들 중 키가 가장 큰 쪽파 두 단을 뽑고, 20개에 1,000원 하는 양파를 4,000원어치 심고 나니 오전 11시가 넘었다. 텃밭을 나오자마자 홍 여사는 자신의 집에서 김치에라도 간단히 점심을 하자는 제안을 해왔지만 나는 이를 거절했다. 어쩌면 ‘김치에라도 간단히’라는 식단이 내 사전에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서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심 맛난 오찬을 기대하며 제안해왔을지도 모르지만, 아침저녁으로 일주일에 8차례나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그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개입하지 않기’, ‘비록 제대로 못하고 빨리빨리 못하더라도 최대한 기다려주기’,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바깥으로 함께 나와 외출하기’라는 나만의 돌봄 원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은대로......     


마치 나에게 4번째 아이가 생긴 것과 같은 관심과 정성을 그녀에게 쏟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는 한 여유롭고 자유로운 나만의 혼밥을, 저녁을, 주말을 지켜내려 고집부리고 있다. 사실 ‘홍 여사 돌봄’ 초반에는 매 끼니를 같이 못하는 미안함과 죄송한 마음에 밥 먹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는 일이 마치 큰 중죄를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식사 준비뿐만이 아니다. 80년을 살아온 인생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옷장의 먼지와 침침해진 눈에는 쉽게 들어오지 않았을 방 안의 거미줄을 치울 때에도 소리 없는 울먹임을 함께 걷어내야 했다. 하지만 도서관을 오가며 읽은 책들 덕에 이런 마음들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 정의하고 과감히 털어내기로 했다.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를 홍 여사 돌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지구력’이기에...... 오래오래 그녀와 함께 텃밭에 드나들려면 내가 적당히 못돼먹어야 한다. 나의 세 아이들도 온실이 아니라 노지에서 키워내지 않았는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의 4번째 아이와 오늘처럼만 지낼 수 있기를 기도하련다.     


<‘할 수 있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돌봐주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의 의미에서, 보살핌이라는 상황 자체가 권력관계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간호인’과 ‘피간호인’이라는 역할을 담당하는 동안 어느새 간호인에게 ‘돌봐준다’는 의식이, 피간호인에게는 ‘돌봄을 받는다’는 의식이 만들어지고, ‘내가 돌봐주는 것이니 불평하지 마라.’ ‘내가 피해를 주니까 불평하면 안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환자의 주체성과 자유를 빼앗게 된다. 그리고 간호인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왜 내가 해줘야 하지? 내게는 내 생활이 있는데 당신 때문에 빼앗기고 있어‘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너무 진지하게 ’내가 꼭 해줘야 한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좋다.(뇌과학자의 엄마, 치매에 걸리다. 노조 아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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