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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할망 Mar 31. 2024

느리게 걷다. 하루 산책(冊) – 새로운 수평선

가끔씩 정체되곤 하는 길을 지나며 ‘제주에 웬 스누피?’하고 이맛살을 찡그리던 곳에서 2시간 넘게 머물게 될 줄이야. 몰라서 그랬다.     

 

매표하기 전, 담팔수나무 위에 집을 지은 까치와 그의 집, 그리고 유독 까치집 주변의 가지만 앙상한 모습을 몇 분이나 올려다볼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을까. 탐조 모임팀과의 동행인지라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This Way’라는 표지판을 따라 실내외 가든을 ‘아주아주 찬찬히’ 둘러보게 된 건 스누피와 그의 친구들의 예사롭지 않은 말풍선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 보았던 만화에서의 기억처럼 느리고 맹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렇게나 철학적이었나.      


물론 생을 다한 큰 나무 앞에서 삽을 들고 경배하는 스누피뿐만 아니라 먼발치에 있는 오름과 소떼,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하는 장끼와 까투리, 참식나무 가지에 사이좋게 터를 잡은 직박구리와 멧비둘기,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죽은 나무에 구멍을 뚫어놓은 딱따구리의 흔적 그리고 제비꽃, 루콜라 꽃, 삼지닥나무 꽃, 왕벚나무 꽃, 동백나무 꽃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귀를 간질이는 새소리들 등등, 딴짓할 거리(New horizons)가 무궁무진했던 데에도 장기 체류를 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이다.      


가끔씩 길이 정체되는 일이 있어도 이제는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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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나는 안다”고 할 때 “Yes, I see(본다)”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은 주로 시각의 면에서 인생을 이해해 간 사람들이지만, “말 잘 들어라”, “말을 잘 안 듣는다”, “말귀가 어둡다”라고 말하는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사물을 이해하려고 한 것 같다. 우리는 귀 없는 기계를 보고서도 “말을 잘 듣는다”, “안 듣는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어떠한 차이가 있은 것일까? 박종홍 교수의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이라는 논문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보는 것’은 로고스적인 것이며 ‘듣는 덕’은 파토스적인 것이다. 즉, 눈의 문화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귀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감적인 것이며 수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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