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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pein Jun 14. 2020

해외편) 1-6. 빅 딜(Big Deal)

1장. 다시는 주재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처드 로드의 정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위즈마 몰은 어떤 브랜드라도 입점하고 싶은 몰이다. 오처드 로드 메인 상권에 버티고 있는 아이온 몰, 위즈마 몰 그리고 다카시마야 백화점 이 세 빌딩은 오며 가며 볼 때마다 단연 1호점으로 모두가 탐내는 쇼핑몰이었다. 그런 탐나는 자리 중 하나인 위즈마 몰의 사장이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난 지금까지 해 온 프레젠테이션과 똑같이 하는 것이 나을지 뭔가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나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초조함과 답답함에 프레젠테이션 두 시간 전쯤 위즈마 몰에 도착해 천천히 돌아보았다. 싱가포르에 온 후로 그렇게 많이 돌아보았던 곳이지만 이번에는 왠지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그 전에는 ‘이런 몰에 매장 하나만 열게 해 주면 진짜 잘 만들어 볼 텐데…’라는 맹목적 가정법의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가만 보자. 적어도 이 자리 정도는 돼야 1호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라는 목적적 가정법이 된 것이다. 뭔가 좀 더 구체적인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내 눈에도 좀 더 실질적인 자리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욕심이 생겼다.


‘그래… 우리 브랜드가 사장까지 올라갔다는 건 이 사람들 내부적으로 얘기가 어느 정도는 됐다는 걸 거야. 만약 입점에 관심이 없다면 굳이 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날 만나자고 하겠어? 아니면 또 모르지. 오히려 사장의 관심과 의지가 커서 이렇게 된 걸지도. 그래서 그들이 더 원하는 입장일 수도 있잖아?’


쇼핑몰을 돌면서 내 머리도 어떻게 돌아버렸는지 지금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협상 전략을 세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곤충이나 동물들이 위협을 받을 때 자신의 덩치를 키우거나 외모를 무섭게 보이도록 변화를 주는 것과 같은 ‘허세 전략’이었다. 난 허세로 내 마인드를 가득 채우고 회의실로 향했다. 이 회의의 무게를 알려주듯 교실 2개 크기 정도의 대 회의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쇼핑몰 실무자들과 미팅을 할 때는 항상 작은 회의실에서 나를 포함해 많아야 세 명 정도가 회의를 했었는데 여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역대급 스케일의 미팅이었다. 베이지 색의 고급스러운 원목 가구로 이루어진 회의실은 대체 몇 명이나 오는지 자리마다 생수 병이 놓여 있었고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장비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침 제시가 먼저 회의실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제시.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저번에 당신과 미팅을 하고 나서 제가 휴가를 때마침 서울로 갔었어요. 그런데 정말 서울 어디를 가도 당신들의 매장이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직접 매장에 들어가서 맛도 봤는데 너무 맛있는 거 있죠? 인테리어 디자인도 너무 예쁘고…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추천했어요.”


“정말요? 너무 감사해요. 사실 우리 브랜드는 직접 가서 먹어보고 체험해보면 장점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걸 못하니까 너무 답답했었거든요.”


“사실 제가 추천하고 나서 경영진 몇 분도 출장으로 서울에 가셔서 매장을 보고 오셨어요. 그래서 오늘 프레젠테이션은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분들도 직접 보고 오셔서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계세요.”


경영진이 서울까지 출장을 가서 매장을 보고 제품을 먹었다는 것은 앞으로 뿜어낼 내 허세의 사이즈를 팍팍 키워주었다. 내가 쇼핑몰을 다니면서 언제나 들었던 생각이 ‘당신들이 진짜 매장에 가서 먹어보고 맛을 알면 나한테 제발 입점해달라고 할 텐데…’였었다. 그런데 위즈마 몰의 경영진과 실무진은 그런 나의 답답함을 그들 스스로 풀어준 상태였다. 서울까지 가서 직접 보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날 직접 만나고 싶다는 것은 우리 브랜드가 그들의 타깃 중 하나가 됐다는 것이었다. 사장을 포함한 임원진 6명에 각 팀 팀장 같은 실무진도 들어왔다. 난 마치 영화 속 전설의 17대 1 싸움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막다른 길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됐다. 약 15분의 내 프레젠테이션이 마치고 불이 켜졌다. 그리고 한 임원이 첫 질문의 활시위를 내게 당겼다.


“지금 1호점에 대해 협의 중인 다른 쇼핑몰이 또 있나요?”


“물론입니다. 어떤 몰이라고 특정해서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지금 많은 몰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몇몇 쇼핑몰과는 브랜드 체험을 위해 서울 브랜드 투어도 협의 중에 있습니다.”


이것이 내 허세의 시작이었다. 사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쇼핑몰도 없을뿐더러(더군다나 오처드 로드의 쇼핑몰은 하나도 없었다.) 몰 관계자들에게 서울 브랜드 투어 시켜줄 예산이 있으면 주재원들 개인 거주지부터 구했을 것이다.


“만약 당신들의 브랜드가 우리 쇼핑몰에 입점하면 우리 쇼핑몰에 어떤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죠?”


한 여자 임원이 물었다.


“당연히 사람이 많이 올 것입니다. 그럼 저희 매출은 당연히 높게 나올 것이고 그로 인해 임차료와 수수료를 아주 잘 낼 수 있겠죠?”


“영업이 잘 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드셨잖아요?”


이미 내 온몸과 정신을 지배한 허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세를 이어 말을 이어갔다.


“서울에 가셔서 직접 드셔 보셨죠? 그리고 맛있었죠? 그래서 지금 이 미팅을 가지신 거 아닙니까? 만약 저희 제품을 드셨는데 맛이 없었다면 지금 저는 이 회의실에 와 있을 수 없겠죠. 저는 싱가포르에 온 후로 시장조사를 위해 전국의, 전 지점의, 전 브랜드의 빵을 모두 먹어봤습니다. 물론 음식은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고 나라마다 차이가 있죠. 하지만 ‘맛있는 음식’에 대한 느낌은 거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분명 맛있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럼 누구에게나 맛있는 게 확실한 거겠죠?”


그들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임원이 물었다.


“맛 이외에 또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까?”


“보셨잖아요?”


난 이미 이 회의에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자신감 있게 말을 이어갔다.


“직접 매장에 가서 보셨죠? 다른 브랜드와 확실히 차별화된 인테리어 디자인에 제품 비주얼. 딱 보셔도 매장에 와서 사진 찍기 참 좋겠죠? 서울 매장 보시면서 여러분도 사진 많이 찍으셨죠? 물론 제품 사진도요. 그리고 어떻게 하셨어요? SNS에 올리시거나 친구 분들한테 보여주셨죠? 친구 분들이 어딘지 궁금해하지 않던가요? 가보고 싶다, 먹어보고 싶다고 하지 않던가요?”


난 마치 신이 들린 듯 허세를 작렬시키며 계속 독백을 이어갔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저에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스스로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F&B 브랜드의 능력 중 가장 중요한 점인 맛이 있어요. 게다가 인테리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한국에 3천 개가 넘는 매장이 있어 관리 능력도 검증이 된 브랜드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계시죠. 이런 브랜드가 싱가포르 1호점이자 플래그십 매장을 오픈하면 여기저기에서 미디어들이 엄청난 관심을 가질 겁니다. 그럼 더 이상 함께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자리를 줄 것인가가 중점이 아닐까 싶네요.”


그들의 속내를 확신한 나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더 틀어 쥐었고 이 시간만은 평소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 쏟아부어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진심으로 가지고 있는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과 현장 중심의 시장 조사를 통해 몸소 체험한 품질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싱가포르라는 이 작은 세계에 불어올 새로운 빵 바람에 대한 비전을 이들 앞에서 마음껏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제시의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됐다. 제시는 우리 브랜드에게 줄 자리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해 나갔다. 유동 인구가 현저히 떨어지는 지하 1층 태국 커피숍 자리를 내세우려는 모양이었다. 제시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그들은 이 자리에 대한 내 생각을 듣고 싶어 했다. 난 다시 허세를 두 어깨에 가득 싣고 일어났다.


“이 자리를 제안하려고 이렇게 큰 미팅까지 열었다면 사실 좀 실망스럽네요. 전 쇼핑몰이 리뉴얼 계획이 있다고 해서 뭔가 큰 변화와 파격적인 브랜드 믹스를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어차피 쇼핑몰 공사하실 거 아닙니까? 리뉴얼답게 확실히 변신해서 짠! 하고 그랜드 오픈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1층에 딘타이펑(Din Tai Fung: 유명 대만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싱가포르는 브래드 토크 그룹이 운영함) 자리로 주시죠. 식당이라 배수, 배기 시설도 될 거고 사이즈도 딱 적당합니다. 그리고 딘타이펑... 3층, 4층에 있어도 사람들 찾아갑니다. 그런데 빵집은요? 반드시 사람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있어야 해요. 여러분도 밥 먹으러 3층, 4층은 올라가도 빵 사려고 올라가진 않잖아요? 밥 먹고 집에 가는 길에 또는 퇴근길에 눈에 보이면 들어가서 우리 애가 좋아하는 빵이나 내일 아침에 먹을 빵 시서 가지 않나요? 그리고 저희처럼 인테리어가 예쁜 매장이 1층에 있어야 오가는 사람들한테도 잘 보이죠.”


그들은 황당한 표정과 함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장이 입을 열었다.


“잘 아시다시피 딘타이펑은 지금 그 자리에서 아주 좋은 매출을 내고 있어요. 그리고 몰 4층에 브래드 토크 그룹 소유인  ‘푸드 리퍼블릭’ 푸드 코트가 있고 지하에는 ‘브래드 토크’ 빵집이 있죠. 딘타이펑을 뺀다고 하면 그 자체도 큰 부담이지만 그 그룹에서 푸드코트나 지하 빵 매장도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요.”


난 이미 허세를 잔뜩 부려왔고 여기서 꼬리를 내린다면 정말 허세로 보일 것만 같아 더 날을 바짝 세우며 말했다.


“사장님, 4층에 그들의 푸드 코트가 있고 1층엔 그들의 식당이 있고 지하에는 그들의 빵집이 있습니다. 그럼 잘 됐네요. 4층을 그들 레스토랑 천국으로 만드세요. 딘타이펑 4층으로 올려서 푸드코트랑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지하에 빵집은 빵집의 특성상 그 자리가 맞기 때문에 자리 이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딘타이펑 4층으로 올려도 매출 안 떨어집니다. 이 자리는 이래서 안되고 저 자리는 저래서 안되면 혁신적인 리뉴얼은 대체 어떻게 하나요? 매장은 다 그대로고 그냥 외부 비주얼만 바뀌는 게 무슨 리뉴얼이에요? 지금 옆에 더 좋은 위치에 아이온 쇼핑몰 새로 생겼잖아요? 그리고 좋은 브랜드들 엄청나게 들어왔잖아요? 그 몰이 강력한 경쟁자라면 위즈 마는 더 새로운 브랜드 입점으로 사람들 끌어와야 하지 않을까요?”


내 의견은 단순히 허세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뼈를 때리는 정말 현실적인 의견이었다. 오처드 로드 지하철 역과 직결된 아이온 쇼핑몰이 생기면서 위즈마 쇼핑몰까지 오던 사람들의 동선이 아이온 쇼핑몰에서 끊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굳이 위즈마 몰까지 걸어서 더 갈 이유가 없을 정도로 아이온 몰에는 쇼핑에 부족함이 없이 다양한 브랜드들이 채워져 있었고 지하철 역도 직결이어서 교통 편의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팩트 폭격까지 단행하며 결국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말이에 ‘오늘이 마지막 세일’이라는 마케팅 전략처럼 공포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만약 제가 브랜드가 아이온 쇼핑몰에 1호점을 열게 되면 우린 오처드 로드에 더 이상 오픈할 수 없을 겁니다. 오처드 로드에는 1호점 딱 하나만 있으면 돼요. 한 상권에 매장을 두 개 이상 오픈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결국 오처드 로드에는 위즈마나 아이온, 그것도 아니면 다카시마야에 유일한 매장이 있게 되겠죠.”


회의를 마치고 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난 겉으로는 허세를 부렸지만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2주일 내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난 이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이 몰에 매장을 열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번처럼 의미 있는 미팅은 처음이었기에 나름 만족할 수 있었다.

내가 브랜드에 대한 자신감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뱉을 수 있었고 회의를 주도하며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시간. 지금까지 브랜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부탁하는 미팅만 하다가 입점에 대한 내 생각과 계획을 전략적으로 표출하고 심리적 밀고 당기기에서 오는 협상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 이 협상에서 오는 성취감에 중독되어 난 계속 협상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나중엔 어떤 문제든 협상 방식으로 소통하려는 나쁜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쇼핑몰의 연락을 기다리는 시간은 피가 말랐다. 혹시나 내 허세가 통하지 않았거나 우리 브랜드가 여전히 그들에게 2% 부족함이 있어 거절의 연락을 받게 될까 매우 걱정이었다. 이 매장의 입점이 실패로 돌아가면 또 언제 후보지가 나올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본사의 ‘식충이’ 대우는 점점 심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기다림과 초조함이 극에 달해갈 때 제시로부터 연락이 왔다.


“딘타이펑 그 자리, 드리기로 했어요.”


꿈만 같았다. 내가 그리고 우리 브랜드가 이 거대한 브랜드를 4층으로 올려 보내고 이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만간 만나서 임차료 조건에 대해 협상하도록 해요.”


제시는 이 한 마디로 내 기쁨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현실로 날 되감기 했다.


“아시겠지만 그 자리 엄청 비쌀 거예요. 임차료 의견이 서로 안 맞으면 계약은 못하게 될 거예요. 부디 우리 서로 잘 협상해봐요.”


제시는 날 모든 과정의 처음으로 되감기 시켜 놓으며 전화를 끊었다. 맞는 말이었다. 자리를 주겠다는 의견일 뿐이지 아직 계약서에 사인이 된 건 아니었다. 딱 보기에도 엄청난 임차료일 것이라고 감이 오는 자리이기 때문에 난 이제 빅 딜에 이은 세부 조건을 협상해야 하는 스몰 딜을 준비해야 했다. 빅 딜은 성사됐지만 스몰 딜이 성사되지 않아 계약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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