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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pein May 20. 2020

국내편) 1-3. 안 하는 것이 더 힘들다.

1장. 거지조차 부러웠다.

잡지사의 반복되는 요청에 난 인터뷰에 응했다. 내가 대단한 연예인도 아니고 독자들의 요청에 계속 숨기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화제의 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잡지에 소개되었고 잡지의 표지에는 내 사진이 실렸다.


그로 인해 나에게 많은 변화들이 생겨났다.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한인 상점에 가면 일기 덕분에 즐겁다고 그냥 가져가라고 하는 사장님도 있었다. 소규모의 팬미팅도 했었는데 나로 인해 약 20명의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북경으로 여행을 오시는 분들의 요청에 가이드 역할도 했었고 여행 코스에 나와 만나는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 오시는 분들도 있었다. 마치 스타가 된 것처럼 내 생활은 아주 많이 변해 있었다. 두려움에 외출도 잘하지 않던, 무료함과 외로움에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망막했던 내게 날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뭔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나는 유명해(?) 졌지만 일기의 연재는 꾸준히 이어갔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공감을 준다는 보람도 있었지만 내 일기의 핵심은 나의 기록이었다. 학교 개강 후 들어간 우리 반에는 총 22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17개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공부했다. 프랑스, 미국, 일본, 스위스 같이 귀에 익은 국가도 있었고 콩고, 몽골, 쿠바와 같이 쉽게 마주치기 어려운 나라의 친구들도 만나며 내 일기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졌고 따라서 내 유학 생활도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깔들로 물들어갔다.


이렇게 많은 변화들이 내 유학 생활에 단비가 되어 싹을 틔워주었다. 이제 난 자라난 싹을 잘 키워 튼튼한 줄기를 세우고 맛있는 열매를 맺어야 했다. 그 열매는 오직 하나 중국어였고 그 목표는 변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찾아온 변화들로 인해 내 목표마저 변한다면 줄기는 방향을 잃고 제대로 자리지 못하고 시들거나 맛없는 열매를 맺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 이런 긍정적인 변화들을 질 좋은 햇볕과 영양 가득한 거름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난 여전히 중국어를 해내기 위해 온 늦깎이 유학생이었고 예전보다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운 좋은 팅부똥이었다.


항상 긍정적인 변화들 속에 유혹도 부록처럼 끼워져 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나에게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이 들려주는 얘기들, 이 참에 다른 걸 해보라는 제안들 등. 이런 상황들을 접하다 보면 나 스스로도 유혹을 만들어 낸다. 진짜 그렇게 해볼까? 이게 내가 갈 길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중국에 갓 왔을 때는 그냥 돌아갈까? 중국어 한다고 뭐가 되겠어? 내가 할 수 있겠어?라는 부정적 유혹이 있었다면 지금은 긍정적 유혹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유혹은 유혹이다. 중국에 온 지 얼마 안돼 부정적 유혹에 흔들릴 때 나는 일기를 썼고 재미가 생기고 사람들이 모이며 유혹을 뿌리쳤다. 그 후엔 그 생활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양념들이 나에게 다른 요리를 해보라고 속삭였지만 내 일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중국어 공부에 들어가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초반의 외국 생활은 힘들고 외롭기 일쑤지만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을 것을 찾아서 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원하는 열매를 맺게 만드는 양분으로 써야 한다.
모든 언어 공부가 쉽지 않듯 중국어 역시 마찬가지다. 하물며 국어 시험도 틀리는데 외국어는 말할 것도 없다. 난 특히 발음과 성조에 많은 욕심을 냈다. 중국인과 최대한 같은 발음과 성조로 말하고 싶어 아나운서 발음 연습처럼 볼펜을 입에 물고 책을 읽기도 했다. 잘 때도 중국어 라디오를 틀고 이어폰을 낀 채로 자고 왜 웃는지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중국 드라마를 멍하게 보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자괴감을 겪기도 하고 ‘이렇게 한다고 중국어 늘겠어?’라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내적 갈등이 반복되고 쌓여 지치면 요요처럼 다시 한국으로 눈을 돌린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메신저를 자주 하게 되고 중국에 있는 한국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라 한국어를 듣고 싶고 한국어로 편하게 얘기하고 싶은 본능을 없앨 수는 없다. 그래서 중국어를 쓰고 사는 것보다 한국어를 쓰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힘들었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연인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꽃을 선물해 주기는 쉽지만 그녀가 싫어하는 담배는 끊기 어려운 것과 같다. 결국 해야 할 것을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몇 배는 더 힘겹다는 것이다.


현지에 와서 언어를 공부하는 이유이자 이점 중 하나는 그 세상 속에 온전히 날 밀어 넣어 생존을 위해 또는 불편하지 않기 위해 언어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스스로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의 한국인은 세계 어디에도 있으며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국 문화와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로 가던지 나 스스로를 완벽히 한국어와 단절시키고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고립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단절이 아니라 조절이었다.


제 아무리 외국어 마스터에 대한 목표가 있다 해도 한국어로 같은 정서를 느끼며 터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서로 도와주는 내 나라의 사람들을 끊어놓고 살 수는 없다. 내가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던 기폭제 역시 내 일기를 사랑해주는 한국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와의 단절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와 외국 생활을 더욱 지치게 만들 수 있다. 너무 과하게 그리고 억지로 내 자신을 외국의 것들에 밀어 넣고 가두면 과다 복용으로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숨통은 만들어가며 생활하는 것이 좋다. 해외 유학도 근무도 생활이 되어야지 생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중국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긍정적 에너지를 받으며 내 목표에 변화 없이 일과를 조절하며 만족하는 중국 생활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어 실력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실력이 올라가다 싶다가 또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또 벽을 어렵사리 뚫고 나오면 산이 나왔다. 거대한 산에 가로막히면 슬럼프에 빠져 잠시 주저앉기도 했다. 중국을 모를 때, 중국인을 접하지 않았을 때는 나 역시 중국을 무시했다. 중국은 위험한 나라였고 중국인은 무례하고 무식한 행동을 일삼는 수준 낮은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 와서는 중국 거지조차 부러웠다. 길거리의 유아나 어린이들도 존경스러웠다. 왜냐면 그들이 나보다 중국어를 잘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받지도 않던 전단지도 받아와 집에서 교재 삼아 공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모든 존재가 스승이었고 나보다 더 우월했다. 이런 마음 가짐으로 거대한 산을 넘었다.


내가 못하는 것을 잘하고 내가 모르는 것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충분히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그것이 내가 목표로 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는 동기가 생겨나고 자기 관리를 통해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이 절반의 성공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마인드 세팅이다. 이때 형성된 마인드 세팅은 내가 향후 주재원으로 해외에서 근무할 때도 항상 부족한 절반을 채워주었다. 국가의 경제력과 사람의 수준에 관계없이 그 나라에서는 현지인 모두가 나의 언어적 스승이고 구글 검색에서는 찾아지지 않는 경험을 가진 실전의 참모들이다.


이렇게 산을 넘어가며 내 중국어 실력도 꾸준히 향상되었고 시간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며 좋아하는 북경 한인 야구 동호회 활동도 시작했다. 북경에는 많은 한인 야구팀들이 있어 한인 야구 리그가 가능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었다. 야구 팀원들은 연령도 다양하고 하는 일도 다양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듣기도 했다. 물론 야구팀 사람들도 내 일기를 알고 있어서 난 쉽게 팀에 스며들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주재원이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당시 북경은 2008년 올림픽 개최의 기대가 온 대륙을 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대와 설렘에 들떠 있었고 중국의 경제는 더 빠르게 높이 날아갈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굴지의 국내 업계 최고 현대 자동차 그룹은 베이징에 터를 잡고 대륙의 도로를 ‘H’ 로고로 수놓기 위한 틀을 마련하고 있었고 15억 인구의 입맛을 매료시키기 위해 오리온, 파리바게뜨, 뚜레쥬르와 같은 식품 업체들도 가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주재원이 파견되어 있었고 주재원들의 생활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야구팀에도 몇몇 주재원 형들이 있었는데 주재원 형들의 야구 장비는 일단 고가 제품이 많았고 장비를 자주 구입하기도 해서 난 그들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형은 월급이 많으니까 남들보다 훨씬 바쁘죠?”

야구장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주재원 형에게 내가 물었다.
 
“응? 나? 별로 안 바빠. 그러니까 이렇게 매주 나오지 않겠어?”

형이 장난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이렇게 바쁘게 일도 안 하는데 월급도 많이 주고 집도 엄청 좋은 데로 구해주고 차량에 기사까지 해줘요?”


난 세상 부러운 표정으로 ‘부럽다.’라는 말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그럼 너도 나중에 주재원으로 한번 나와봐.”
 
그 당시 형은 나름대로 무척 바쁘고 힘든 해외 파견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의 “주재원으로 한번 나와봐”라는 말은 주재원을 겪은 입장의 내가 생각해보면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좋은 거니까 너도 나중에 꼭 해봐.’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네가 해보면 사실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란 의미가 함께 섞인 중의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이니까 아마도 형은 가볍게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형의 너스레 섞인 그 한 마디는 화살처럼 날아와 내 이마를 관통하며 인식을 바꾸었다. 그리고 2차 목표가 생겼다. 사실 중국어를 해낸다는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오던 나였기에 그다음에 대한 해답은 막연하게 ‘취업’이었지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래, 만약 내가 중국어를 해냈어. 그다음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답을 얻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은 해외 주재원. 글로벌 인재가 되어 세계 이곳저곳을 누리며 살아볼 수 있는 기회. 회사라는 큰 우산의 보호 그리고 그로부터 제공되는 고 연봉과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생활 조건들. 소박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회사원의 로망 중의 하나 해외 주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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