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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춘 May 15. 2020

사와디 캅, 코쿤 캅(1)

 때는 무더운 여름날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늦은 밤, 나는 태국 방콕행 게이트에서 보딩 업무 중이었다. 아무리 온도 조절이 잘 되는 공항이라고 해도 한여름은 더웠다. 특히나 통풍 안 되는 유니폼을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보면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그래서 나는 퇴근하면 집에 가자마자 에어컨을 틀어놓고 냉수 샤워를 마친 다음 다우니 냄새가 나는 뽀송뽀송한 새 잠옷을 입고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마시며 무한도전을 볼 아아주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출항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네 명이 감감무소식이었다. 시스템에 등록된 정보로 미루어 봤을 때 엄마, 아빠, 아들 둘 일행인 태국인 가족이었다. 출항시간이 지나고도 이 승객들은 전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이 넷이 빠진 비행기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승객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시스템으로 승객들의 법무부 통과 기록을 조회해 볼 수 있는데, 여권 번호를 넣어보니 이 일행은 이미 카운터가 있는 일반구역에서 게이트가 있는 보안구역까지 넘어온 상태였다. 대체적으로 직원 없이 승객들끼리는 일반구역으로 되돌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일반구역으로 되돌려 보낼 직원 한 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상태에서 아무도 이 태국인 가족의 오프로드(OFF-LOAD, 역사열) 업무를 원치 않았다. 모두가 관리자의 눈치를 봤고, 제발 자신이 걸리지 않기만을 빌었다. 결과적으로 오프로드는 당시 막내 직원이었던 나의 몫이 되었다.


 "미안해, 만춘아. 서류 작성하고 있으면 금방 승객들 올 거야. 마무리 잘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해!"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게이트에 있던 직원들 모두 본인이 아니라 안도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들은 퇴근 시간이 늦어진 후배를 향해 약간은 안쓰러운 눈빛을 남긴  사라졌고, 나는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태국인 가족들이 한시바삐 와주기만을 바라며 탑승구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그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삼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 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채 나타났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외 다른 가족 구성원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오프로드 해야 할 승객은 분명히 네 명이었다. 이 손님의 남편과 아들 한 명, 총 두 명이 더 있어야 했다.


 나는 태국어에 영 소질이 없다. 그런데 상대방도 한국어엔 젬병인 듯했다. 그렇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Where is your family?"


 홍만춘은(는) 영어를 시도했다.


 "?"


 실패했다.


 "남편, 어디 있어요?"

 "아, 남편! 국민! 갔어!"


 다행히도 나의 어마무시한 태국어 실력보다는 손님의 한국어 실력이 더 나은 듯했다. 그러나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국민?"

 "응! 우리, 다시, 만나."

 "남편이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응. 남편, 돈, 국민, 은행, 갔어."


 자세히 들어보니 남편은 돈을 바꾸러 국민은행에 갔다는 듯했다. 출입국 기록을 조회해 봤을 때 일행 네 명은 같은 시간에 출국심사를 받고 보안구역으로 넘어왔었다. 일반구역에서 헤어진 건 아니라는 소리다. 보안구역에 있는 은행은 환전만 담당하기 때문에 환전하러 갔다는 뜻인가 싶어 같이 벤치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기로 했다. 상황이 어찌 됐든 나는 이 네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나가야 무한도전을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응당 나타나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출항 시간이 삼십여 분이 훌쩍 지났는데 왜 아직까지 탑승구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거지? 비행기 시간을 착각했나? 이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려는 게 아니라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사실은 순진한 척하며 인천공항에 폭탄을 설치하기 위해 고용된 특수 요원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기 시작할 무렵 나는 탑승구 앞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서히 퇴근 시간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도전이고 자시고 지금 당장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내로 퇴근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이 사람의 남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게이트 근처에 있는 안내데스크에 가서 안내 방송을 해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안내데스크와 탑승구 위치가 가까워 마음만 먹으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남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불행 중 다행으로 안내데스크에 가는 길에 아내가 반색을 하며 어딘가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어댔다.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엔 잔뜩 지친 얼굴로 양손과 등에 한가득 가방을 짊어진 남자가 네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짜증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늦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한 시간 씩이나 늦게 오다니!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려고 입을 뗐다.


 "사와디 캅!"


 표정과 억양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였지만 정작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사와디 캅'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태국어라곤 '사와디 캅'과 '코쿤 캅'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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