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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춘 May 27. 2020

사와디 캅, 코쿤 캅(2)

 "사와디 캅!"

 "… 사와디 캅."


 잔뜩 성난 표정으로 씩씩하게도 '안녕하세요!'라고 외쳤으니 상대방 쪽에서 얼마나 황당했을까. 다시 생각해도 창피하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태국어는 여성어와 남성어가 따로 있고 '사와디 캅'의 여성어는 '사와디 카'라고 한다.


 일단 빠른 일처리를 위해 승객들의 여권, 탑승권과 각종 서류들을 한데 모았다. 이 승객들은 면세점에서 산 물건도 없었다. 일처리가 하나 줄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오프로드를 진행한다면 미약한 확률이지만 오늘 내로 퇴근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고 누가 그랬던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일 퇴근이 가능할 수 있을 거란 판단 미스 첫 번째. 탑승구 위치가 공항 내에서 트레인을 타고 건너와야 하는 탑승동이었다. 여객동(터미널 1) 오프로드는 탑승장(3층)에서 그대로 탑승장으로 나가면 되기 때문에 시간이 비교적 짧게 걸린다. 하지만 트레인을 타고 와야 하는 탑승동 오프로드는 탑승장(3층)에서 입국장(2층)으로 내려가 트레인을 타고 다시 여객동(터미널 1)으로 건너간 다음, 입국장(2층)에서 탑승장(3층)으로 올라가고 나서야 비로소 일반구역으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층간 이동에는 보안검색대 통과가 필수불가결이다. 오지게 오래 걸린다는 뜻이다.


 두 번째. 이 사람들은 짐이 많았다. 아니, 우리 항공사 직원들, 보안검색대 직원들을 통틀어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짐을 아무도 안 잡고 그냥 보낼 수가 있었단 말인가! 네 명 가족이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짐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엄마, 아빠 단 두 명 뿐이지 않은가! 무거운 짐 때문에 이동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파티원들에게 '헤이스트(게임 메이플스토리에 나오는 이동속도 향상 스킬)'라도 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 번째. 나는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 이 갓난아이가 그렇게 자주 때에 맞춰 맘마를 먹어줘야 하는지 몰랐다. 두 번째 보안 검색대에서 검색을 마친 엄마가 갑자기 간이의자에 앉아 둘째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모유수유를 한다고? 내가 잠시 당황해하는 사이 인형 같은 큰 눈을 가진 첫째 남자아이가 보안검색대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검색대 직원들의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속 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헬로, 헬로.' 거리며 귀신같이 여직원들의 품에만 폭삭폭삭 잘도 안겨댔다. 그리고 보안검색대를 떠날 때쯤 아이의 품엔 갖가지 과자들이 안겨있었다.


 네 번째. 관리자님으로부터 사전 고지를 들은 바에 의하면 이 태국인들은 한국에서 어느 정도 불법체류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들이 한국에 입국했던 날짜보다 엄마 등에 업혀 있는 갓난아이의 생일이 더 늦은 걸로 보아 원정출산인 듯 했다. 이미 한 번 불법체류를 저질렀던 자들을 일반구역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인지라 법무부 직원들도 골머리를 썩는 듯했다. 잘못하다간 그대로 또 불법체류를 저지를 확률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이 인형 같은 예쁜 눈을 가진 첫째 아이는 그야말로 떼쟁이였다. 갓 태어난 동생에게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지 엄마 아빠의 눈길을 끌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발라당 드러누워 떼를 써댔다. 세 번째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나서야 드디어 카운터 고지가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쪼그만 악마가 또다시 바닥에 엎드려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갓난아이를 양 팔에 안고 있었고 아빠는 네 명 분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결국 손이 빈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우리 애기 누가 그랬어요-?"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해맑게 내 품에 매달려 아까 보안검색대 여직원들이 쥐어준 과자를 흔들어대며 뭐라 뭐라 태국어로 재잘거렸다. 나도 영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래도 아이의 기분이 좋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래, 네가 기분 좋으면 됐다. 퇴근이 대수냐.


 출근하자마자 오프로드를 진행했더라면 근무시간의 절반은 아마 이 가족들을 위해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오프로드 하나 하는 데 뭐 그리 오래 걸리냐며 관리자님께 야단을 맞았겠지.) 카운터에 도착해 이들이 아까 낮에 지불한 현금 다발을 환불해 준 뒤 부쳤던 수하물을 찾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위탁수하물은 보안구역에서 일반구역 3층으로 되돌아 나온 후 1층 입국장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수하물 직원이 건네준 짐들을 이들의 손에 쥐여준 후 해맑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인사했다.


 "코쿤 캅!"


 그리곤 대답도 듣기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발길을 돌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탑승동 오프로드는 보통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 날 나의 태국인 가족 오프로드는 우여곡절 끝에 총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막차도 끊긴 야밤에 락커룸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아, 그래도 편의점은 24시간이라 다행이다. 콜라는 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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