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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춘 Jun 11. 2020

직장살이의 기쁨과 슬픔(1)

 제주공항에서 국내선 파트 근무를 하던 시절,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다. 바로 한 선배와의 추억이다.


 첫 파견근무로 근무지가 인천공항에서 제주공항으로 옮겨졌을 때, 아무것도 몰라 어리바리하던 나를 포함한 몇 명의 동료들에게 한 선배가 손을 내밀어줬다. 명찰 속 이름은 '김가영(가명)'이었다. 선배는 일이 있거나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물어보라며 본인의 전화번호를 쾌척했다. 동료들은 가영 선배의 호의가 기뻤던지 공항 근처 맛집을 물어보았고, 선배는 사람 좋게도 열 군데 이상의 맛집을 일일이 지도 링크를 걸어 보내주었다.


 "다들 제주도 오면 고기국수 먹으러 여기만 가더라? 현지인들은 아무도 안 가거든. 고기국수 먹고 싶으면 꼭 여기로 가."

 "와,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가볼게요!"


 아직 첫날이라 서먹서먹하던 선후배들 사이에 유난히 살가웠던 가영 선배는 공항 내 지리도 잘 모르던 우리를 중식당으로 데리고 가 주었다.


 "우리 메뉴 여러 개 시켜서 같이 나눠먹자. 여기는 이거랑 이거 진짜 맛있어."


 중식당에서 점심으로 간단히 먹기엔 깐풍기나 유산슬은 좀 과하고 비싼 음식들이었지만 선배와 친해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요! 저흰 상관없어요."

 "아참, 인천에서 지연이한테 전화 왔더라. 너네 잘 봐달라고. 그래서 내가 걱정 말라고 했어."


 아, 이렇게 착한 선배들만 있다면 여기에 몇 년을 있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여기 식권 세 장씩 쓰면 되겠다."


 헉. 식권 세 장이면 엄청난 플렉스다. 한 번 식사에 오천 원짜리 식권을 세 장이나 쓰는 직원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선배, 그러면 만이천 원이 모자라는데요?"

 "아 그래? 인천은 식권 쓸 일 잘 없었지? 나 지금 식권 별로 안 남았는데 너네가 나머지 나눠서 내줄래?"

 "네에...! 그럼요."


 사실 같은 식권이지만 인천공항에선 한 장에 4,000원이었고 제주공항에선 5,000원이다. 그동안 우리가 식권 쓸 일이 더 많았단 소리다. 가영선배가 오해하고 있는 듯 했지만 굳이 따지듯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묵묵히 남은 돈을 결제했다.


 길고 길었던 하루 업무가 끝나고 디브리핑 시간이 오자 가영 선배가 과도를 들고 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과일을 깎아주기 시작했다. 항상 누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에 대한 얘기밖에 없어 삭막해 마지않던 인천공항 디브리핑 분위기와 다르게 왁자지껄 수다스러웠다. 이곳에 대한 첫인상은 대성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좋았다. 사람들만 좋다면야 일이 힘들어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 이틀 시일이 흐르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겉으로 화기애애하게만 보였던 이곳은 묘하게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놓고 무리를 짓는가 싶으면 또 다른 무리로 흩어지기도 하고, 어제는 사이가 나빴던 사람들이 오늘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 뒤에서 대놓고 우리 욕을 하는가 싶어 벌렁벌렁한 가슴을 안고서 자세히 들어보면 마치 처음부터 우리 얘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배척하는가 싶다가도 친절했다. 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영 선배와 옆 자리에 앉아 나란히 수속을 하게 되었다. 잠시 카운터가 한가해진 틈을 타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식사하셨어요?"

 "…네."


 선배는 대꾸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ㄴ' 비슷한 발음을 내뱉더니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뒤이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고 있으려니 손님이 줄을 섰다. 일단 끝나고 다시 말 걸어보자, 바빠서 그랬나 보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님을 받았다. 하지만 일이 끝나면 다시 말을 걸어보자는 나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가영 선배는 업무가 끝나자마자 바람처럼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후 가영 선배와는 좀처럼 스케줄이 맞지 않아 대화를 나눠 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나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제주공항으로 내려온 동기가 하소연을 했다.


 "언니! 아까 나 가영 선배 옆자리에서 수속했는데!"


 맞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나도 선배랑 같이 수속했었지.


 "응, 근데?"

 "저번에 가영 선배가 추천해줬던 국숫집, 언니랑 같이 갔다 왔다고 내가 선배한테 막 자랑했거든. 내가 '선배, 저 어제 만춘 언니랑 XX국수 갔다 왔어요!'라고 했더니 선배가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

 "나를 막 빤히 쳐다보면서 '많-이 드세요-.' 이러는 거야! 완전 비꼬듯이!"

 "뭐라고?"


 눈이 똥그래졌다. 가영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고? 첫인상은 서글서글 인상 좋은 언니였는데.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수속할 때도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 대하듯 굴긴 했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선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건 이후로 가영 선배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일은 없어졌지만 같이 일을 하며 피치 못하게 이름을 불러야 하거나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선배는 교묘하게 대화를 피했다.


 "선배님, 저 어느 카운터 앉으면 될까요?"

 "아… 여기랑 바꿔주면 될 거 같아요."


 쉬는 시간을 끝내고 온 후배가 가영 선배에게 앉을 자리를 물어보았다. '어디 앉으면 될까요?'는 '누구랑 교대해주면 될까요?'='이제 누가 쉬러 가면 되나요?'라는 뜻이다. 선배는 고갯짓으로 나를 가리켰고, 선배가 말하는 '여기'란 바로 나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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