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의 월급날은 엄마와 언니의 손을 잡고 함께 서점에 가는 날이었다. 관심도 없는 책 표지들을 둘러보다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이었다. 자유롭지만 마치 감옥 같기도 한, 미지의 공간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가 그려진 표지였다. 그것이 내 자의로 산 첫 번째 책이었다.
엄마가 의자 하나 없는 앉은뱅이 생활에 최적화된 집안의 땅바닥에 앉아 <좋은 생각>을 읽기 시작하면 나는 꼭 엄마 옆에 붙어 엄마가 어린이날 선물로 사준 <뚱딴지 만화 명심보감>이나 <만화로 읽는 탈무드> 등을 읽었다. 책 내용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와 체온을 나누며 사락사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좋아 그렇게 한참을 엄마 옆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좇았다. 대학에서 디자인과를 나와 쇼핑몰에 취직해 부서를 선택해야 했을 때도 한직 중의 한직인 '도서 디자인팀'에 지원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을 다른 지인들은 비웃었다.
"야, 요즘 누가 소셜커머스에서 책을 사냐?"
슬프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 부서는 매 분기 매출 꼴등이었다. 그나마 아동도서 분야에서 매출이 좀 나오는 듯 했으나 도서정가제의 시행으로 인해 그마저도 망해버리고 말았다.(국내 도서의 할인율이 최대 10%를 넘기면 안 되기 때문에 소셜커머스의 강점인 최대 세일이 불가능해졌다.) 나는 결국 강압적인 부서 이동과 떠넘기기식의 업무량 증가로 인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첫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이후 나의 새로운 취업 준비가 시작되었고 퇴직금과 모아뒀던 월급을 다 까먹으면서 돈이 궁해졌다. 나는 살림살이에 보탬이나 될까 싶어 앞으로 보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골라 알라딘 중고서점에 갖다 팔았고 동시에 엄마의 폭탄같은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엄마는 책 갖다 파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책은 보물이야!"
나는 엄마 슬하에서 책을 내다 판 죄인이 되었고 앞으로는 책을 팔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서야 엄마의 잔소리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그 이후로도 엄마 몰래 예스이십사에 책을 내다 팔았지만 엄마한테는 비밀로 했다.)
"돈이 없으면 엄마가 줄게. 책은 팔지 마."
엄마는 책을 사랑했다. 나와 언니에게 어린이날 사랑을 담은 책을 선물했고, 책을 디자인하는 딸내미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어릴 적 <정글에서 살아남기> 사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만화책이라고 안 사준다며 툴툴대는 친구에게 '우리 엄마는 책 빌려보면 마음 편히 못 읽으니까 다 사주겠다던데? 우리 집엔 살아남기 시리즈 다 있어!'라며 으시댈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나도 한 번만 빌려볼 수 있냐며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자랑이었던 엄마는 서서히 작아졌다. 감옥 같던 세상이 힘에 겨웠는지 몸속에 자작자작 암세포를 키워냈다. 엄마는 죽기 직전까지 책으로 죽음을 공부했다. 엄마의 책장에 꽂혀있던 새로운 책들의 제목은 온통 '죽음'이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했을지 가늠이 안 돼 마음이 아렸다.
엄마는 감옥을 버린 작은 새가 되어 자유로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가 떠나기 전 나에게 물려준 유산은 바로 책 읽는 힘이었다. 책은 엄마다. 엄마는 책이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힘은 책으로부터, 엄마로부터 나온다. 나에게 책이라는 세상을, 엄마라는 세상을 선물해 준 소중한 유산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그리운 마음이 바람이 되어 옷깃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