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형주 Mar 23. 2024

위스키에 대한 기억 몇 가지

주간 여행 에세이 30

 140일간의 멕시코+남미 여행을 끝내고 유럽으로 떠났다. 40일 정도의 유럽 여행 루트는 포르투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벨기에, 이탈리아다. 이 중 스코틀랜드 여행의 목적은 바로 위스키다. 몇 년 전부터 위스키를 즐기기 시작하면서 스코틀랜드로 한 번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계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먼저 후보지에 올려 둔 장소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다 보니 남미를 먼저 가는 것이 경로 설계상 최적이라 마지막에 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위스키 여행의 목적지는 대략 두 곳이다. 더프타운을 중심으로 스페이사이드 증류소와 아일라 섬의 증류소들이다.


 나는 위스키를 좋아한다. 친구를 집에 초대할 때는 꼭 위스키 한 병은 준비해 두고, 엠티를 가거나 친구집에 방문할 때도 꼭 챙긴다. 참치회에, 고기에, 그 외 다양한 음식들과 함께 즐긴다. 블렌디드이든 피트든 버번이든, 저렴하든 비싸든 대부분 좋아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즐기기 시작했는가, 하고 떠올려보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친구와 언제 친해졌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위스키에 대한 초기 경험 중 몇 가지는 기억하고 있다.

 첫 번째 기억은 내 첫 위스키에 대한 기억이다. 날짜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 2018년 크리스마스다. 대학원생 시절이라 크리스마스임에도 학교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왠지 평소처럼 보내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마트에 가서 몇 가지 음식과 위스키를 한 병 사 왔다. (지금이야 편의점에서도 쉽게 위스키를 찾을 수 있지만, 2018년에는 대형마트에 가야 겨우 찾을 수 있고 지금보다 종류도 확연히 적었다.) 구매한 위스키는 밸런타인 파이니스트. 블렌디드 위스키를 전문으로 만드는 밸런타인의 가장 저렴한 위스키다. 전자레인지로 만든 칠리새우와 비엔나소시지를 준비하고, 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부어서 곁들이고,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에 넷플릭스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틀었다. 이게 내 첫 위스키에 대한 기억이다. 이 모습을 이때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참 처량하다. 돌이켜보면 이때 크리스마스를 왠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던 이유는 비로소 외로움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달갑지 않은 감정이지만 그로 인해 지혜를 만나고 결혼하게 되었으니, 외로움 그리고 위스키에게 감사해야 할 지도.


 그다음 기억은 피트 위스키에 대한 기억이다. 대학동기 서 씨는 학부 1년을 남겨두고 입대를 했다. 나는 군대를 가지 않고 대학원으로 직행했기에, 서 씨가 복학했을 때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서 씨가 술을 마시자고 불러내고는 쌍용사거리로 향했다. 거기에 괜찮은 위스키바가 있다는 것이다. 메뉴판이 따로 없고, 취향을 말하면 주인이 알아서 추천해 주는 그런 스타일의 바였다. 밸런타인 말고는 경험이 없기에 무난한 것으로 추천해 달라고 말했다. 첫 잔은 글렌피딕 12년. 가장 많이 팔리는 유명한 싱글몰트 위스키다. 맛있게 마셨는데 조금 개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번째는 호불호가 있는 독특한 것으로 추천받았다. 조니워커 블랙(혹은 더블블랙)이었다. 글렌피딕보다 달달하고 스모키 향이 돋보이는 위스키다. 특히 처음 맛보는 스모키 향이 마음에 들어서 세 번째 위스키는 더욱 스모키 한 위스키로 추천을 받았다. 바로 아드벡 10년. 스모키 향뿐만 아니라 정로환, 목초액 같은 특이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나중에는 그것이 피트 위스키의 특징, 특히 아일라 섬에서 만든 위스키에서 주로 맛볼 수 있는 특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바틀을 라프로익 쿼터캐스크로 구매하고, 수년이 지난 지금은 아일라 섬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서 씨와는 둘 다 학교를 떠난 후에도 서울에서 몇 번 만나 위스키를 마셨고, 함께 남대문시장 주류시장에도 가기도 했다. 나에게 위스키를 알려준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내가 도수만 높은 증류주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번에 세계 여행을 하며 위스키 이외의 다양한 술을 마셔보면서 그 의문은 풀렸다. 멕시코에서 테킬라 마을에 가서 테킬라도 마셨다. 남미에서는 주로 럼을 필두로 한 사탕수수 증류주를 마셨고, 증류주는 아니지만 칠레-아르헨티나에서는 매일같이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나에게 위스키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다른 증류주도 맛있고 독특하지만 몇 잔 먹고 나면 쉽게 질린다. 와인도 훌륭하지만 고도수의 술이 주는 풍부한 향과 질감은 따라오지 못한다.


 여러 양조장을 돌아보는 이번 여행은 앞으로 내 위스키 체험을 어떻게 바꿀까. 어떤 위스키를 마실 때 그 양조장의 풍경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길 수도 있고, 피트 향을 맡을 때 아일라 섬의 공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위스키 마니아인 친구들에게, 나 이 위스키 양조장 갔다 왔는데 하면서 자랑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나의 위스키 체험은 점점 더 풍부해질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양적으로 질적으로 넓어지고 깊어지는 삶을 추구한다. 위스키에 대해서는 이번 여행이 큰 변곡점이 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