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된 종이책은 인류 역사상 혁신적인 발명품으로 꼽힙니다. 구텐베르크 이전과 이후의 세계로 나뉜다고 하죠. 종이책의 대량 배포가 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확장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 이후 긴 시간 동안 종이책은 그 영향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종이책은 그 입지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종이책의 그 막강했던 영향력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더욱 쪼그라들게 만들었습니다. 얄쌍한 스마트폰이 묵직한 종이책을 벼랑 끝으로 밀어낸 거죠.
그럼 종이책은 쓸모 없어졌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종이책의 종말을 선언했더랬죠. 전자책의 등장으로 그나마 종이책의 남은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라 예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상황을 보면 당장 종이책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종이책의 아날로그 감성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디지털 미디어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이 깨달았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고, SNS 때문에 관계에 대한 피로감이 늘게 된 거죠. 디지털 세상에 갇힌 우리의 생활이 피곤해진 겁니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심심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혼자 있으면 심심할 틈 없이 무엇인가를 계속 제공합니다. 게임, SNS, 유튜브 등 심심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은 시간을 때우기에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우리가 생각할 시간은 그만큼 사라졌습니다.
디지털 세상에는 시간의 포식자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디지털 게임이 중독성과 시간을 소비하는 미디어로 악명을 떨쳤다면 요즘은 유튜브가 디지털 세상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미디어가 되었습니다. 작년 인터넷이용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만 3세 이상 이용하는 동영상 서비스 중 유튜브 이용자가 87.9%를 차지했습니다.(2020년도 인터넷이용실태조사.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그 이유는 게임의 유저가 젊은 층에 한정되었다면 유튜브는 유아에서부터 노인세대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시간의 포식자이죠.
[2020년도 인터넷이용실태조사.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텍스트보다 영상의 몰입 강도가 훨씬 크다는 점은 궂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무수히 많은 영상 콘텐츠를 보유한 유튜브는 사람들의 갖가지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콘텐츠가 넘쳐나죠. 게다가 인공지능은 개인의 취향을 분석하는 알고리즘을 이용해 개인에게 맞춤형 영상을 끊임없이 노출시킵니다.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거죠.
유튜브 영상의 몰입은 막강하지만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주지는 못합니다. 영상은 시간의 흐름대로 봐야 하니까요 중간에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생각하고 싶어도 유튜브는 바로 다음 콘텐츠를 클릭하라고 유혹합니다. 게다가 짧게 편집된 영상을 골라보기 때문에 영상의 맥락을 파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보고 넘기는 행동의 반복입니다. 같은 영상을 반복 재생하면서 곱씹어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영상 분석가가 아닌 이상 1.5배속을 선호할 뿐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신문기사나 유튜브를 보면서 생각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하는 생각은 숙고하는 사고가 아닙니다. 디지털 미디어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하는 생각은 그냥 의식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생각입니다. 직관적 사고죠. 지나가면 좀 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 직관적 사고입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생각을 직관적 사고(시스템사고1)와 숙고하는 사고(시스템사고2)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직관적 사고는 생각하는데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일어나지만 오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숙고하는 사고는 생각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만큼 자주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숙고하는 사고를 의식적으로 회피하기 쉽습니다. 골치 아픈 생각을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는 걸 싫어한다는 점을 디지털 기업은 간파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디지털 미디어 세상에서 숙고하는 사고의 기회를 소각하고 있습니다.
종이책과 디지털 미디어의 큰 차이점은 종이책에는 링크가 없다는 점입니다.
추천 영상도 없죠. 당연히 알고리즘에 휘둘릴 일도 없습니다. 종이책을 폐쇄적인 미디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디지털 미디어가 얼마나 개방적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죠. 모든 세상에 열려있으니까요. 종이책은 인쇄된 내용만 봐야 하는 폐쇄적인 미디어지만, 책을 읽다가 잠시 쉬면서 사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반면에 디지털 미디어는 잠시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잠시 생각하는 시간은 접속의 단절을 의미하니까요. 디지털 미디어는 우리가 생각할 기회를 갖지 않도록 수많은 알고리즘을 동원합니다. 여하튼 디지털 미디어에는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수많은 링크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디지털 미디어가 인간의 숙고하는 사고를 방해하는 한 종이책의 종말은 오지 않을 겁니다. 링크가 없는 종이책은 내용의 몰입을 위한 최고의 미디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