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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Jun 16. 2021

유형의 네 컷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6월 15일


 감정에 매몰된 새벽과 한낮을 보내고 눈뜬 저녁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감정이란 한 순간 거세게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다 타고 남은 곳은 잿더미뿐이다. 그 자리를 쓸었을 때 손에 묻어나는 검은 얼룩들은 금방 지워지고 만다.


 어느 순간 택배를 뜯는 게 조금 귀찮아졌다. 이틀 전에 온 택배를 오늘에서야 뜯은 것도 이런 이유. 친구들이 이미 잔뜩 쌓아뒀으면서 또 샀냐고 나무랐던 스티커와, 인생 네 컷 사진을 넣을 수 있는 바인더가 나왔다. 바인더에 그동안 찍었던 인생 네 컷 사진들을 넣으며 생각했다. 폴라로이드 사진도 그렇고, 인생 네 컷도 그렇고 난 사진을 데이터로 남겨두는 것보다 실체로 남기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걸.


 불타는 감정을  문장으로 남기면 잿더미가 아니라 글이 되는 것처럼, 사진을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유형의 무언가로 만들면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그니까 쉽게 지나치지 않을 어떤 의미가 되는 것만 같다. e-book과 종이책이 주는 느낌이 다른 것과 같이.


 아이패드로 다이어리를 쓸 수 있으면서도 굳이 아날로그 다이어리를 사는 것도, 음원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을 굳이 음반으로 소유하는 것도, 핸드폰이나 노트북으로 쉽사리 볼 수 있는 사진들을 굳이 인화하는 것도. 시각과 청각에 촉각을 더했을 때 생기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겠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해졌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이 바인더를 핑계로 앞으로 더 많은 네 컷을 남겨야지. 과거의 그 순간을, 그 표정을, 오래 남기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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