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문화재단 창립 15주년 기념 전시 《작은 빛》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 줄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이제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 영화 <설국열차> 中 남궁민수의 대사
종말과 같은 혹한기를 맞이한 지구의 마지막 인류를 다룬 영화 <설국열차>, 열차 보안 설계자 남궁민수는 열차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차의 창문으로만 보던 밖은 이제 녹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라며. 이처럼 고착된 상식을 깰 가능성이란 변수는 현실을 직시한 유연한 사고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수림문화재단 설립자 동교 김희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고, 재단 창립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 《작은 빛》이 김희수아트센터 아트갤러리1에서 열렸다. 본 전시는 재단의 지나온 길을 토대로 설립자가 강조했던 가치를 다양한 방식의 예술 언어로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 김희수 선생의 삶을 조명하고, 예술적으로 해석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의 탈피
서성협
제주에서 나고 자란 서성협 작가는 혼종성을 이야기하며, 다문화 가정을 바라보는 편견과 시선에서 출발해 절대적으로 순수한 상태에 물음표를 던져본다. 모든 기회는 육지에 있을 것이라 믿었던 작가에게 바다는 낭만과 여유가 아닌 제한의 영역으로 다가왔다고. 경계의 시작이자 끝이기도 한 방파제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는 그의 경험처럼 테트라포드 형상을 한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청각적 요소를 통해서 작가가 느꼈을 막연함까지 전달되는 느낌.
<free-form frame> 시리즈에선 틀 안에 잘 짜인 라탄 구조와 그 바깥에 삐져나온 형체를 통해 복잡하게 얽힌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작품이 설치된 받침대뿐만 아니라 전시장 바닥에도 잘려 나간 라탄 조각이 흩뿌려져 있어 흥미로웠다는 점. 라탄과 가죽을 주재료로 신축성을 가지면서도 견고한 이중적 물성을 지닌 작업을 보여줬는데, 이렇듯 작가는 동양과 서양, 신성과 세속, 전통과 현대, 장식 오브제와 실용 악기 등 대립의 경계를 허무는 인식을 제안한다.
다시 쓰는 드라마
서인혜
탈중심적이고 미시적인 세계에 주목하는 서인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김희수 선생의 개인적 생애를 담아낸 작품들을 선보였다. 공테이프에 다시 보고 싶은 만화영화를 녹화한 것처럼 작가가 수집한 이미지들을 재배치한 <희수의 비디오 카셋트>(2024).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김희수 선생이 생전에 기억하고 싶어 했을 것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풀어냈다. 동시대를 살았던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과 ‘금이 가득한 우물’이란 뜻을 가진 金井(금정, 가나이)를 연결해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점, 20세기 후반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과 영상에 들어간 신형원의 <개똥벌레> 멜로디 등 복고적인 요소를 활용해 과거를 재서술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앞) 서인혜, <♡_희수>, 2024, 철사, 종이, 점토, led 조명, 480x130cm (뒤) 서인혜, <♡_재림>, 2024, 철사, 종이, 점토, led 조명, 230x110cm
반딧불이 빛을 내는 까닭은 같은 종의 다른 반딧불과 소통하거나 짝을 찾기 위해서라고. 그렇기에 홀로 빛을 내지 않고 주변의 반딧불이와 함께 빛을 낸다. <♡_희수>, <♡_재림>에선 이러한 반딧불의 작고 동그란 신호를 김희수 선생의 삶에 빗대어 설치 작품으로 보여준다. 그와 그의 짝인 이재림 여사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따와 지은 수림에 담긴 사랑과 희망에 다시금 빛을 비춘다.
끊임없는 생명의 순환
지희킴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과 원초적인 색채를 보여준 정원 시리즈에서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는 꽃잎,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는 독거미, 화려한 나비가 등장하나 거미줄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 등 보이는 것과 달리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기도. 작품의 제목으로 ‘복수’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고, 상처와 독기 품은 마음을 표현하는 듯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처럼 인간의 감정 역시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빗댄 느낌. 지희킴 작가는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권력의 기호로서 작동하는 몸 언어 등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미지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재맥락화를 시도했다고.
작가는 영국 유학 시절 언어의 장벽을 느꼈는데, 읽을 수 없는 활자를 이미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북 드로잉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도서관과 익명의 개인으로부터 기부받은 책은 쓸모없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부여받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우연과 즉흥이 뒤섞인 드로잉을 매개로 영국, 대만, 일본 등 세계 시민들과 소통한 기록을 공유하고, 이번 전시에선 한국의 새로운 참여자들이 함께한 드로잉 워크숍 <드로잉의 정원>이 운영되었다. 올해 6월, 창립 15주년을 맞이한 수림문화재단의 ‘아트페스티벌 숲’ 축제에서도 드로잉 워크숍이 진행되었다고!
사실과 허구의 변주
최영
지키고 싶은 낮은 땅이라, 김희수 선생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장편소설 『로메리고 주식회사』로 제7회 수림문학상을 받은 최영 작가, 그가 만든 가상의 인물과 실존했던 인물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공존하는 소설 <작은 빛>에 생생히 담겨있었다.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온 루이즈 깔마가 재단의 면접을 보게 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데, 소설의 배경이 되는 김희수아트센터와 수림큐브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실감 나게 감상할 수 있었을 것. 아니나 다를까 실제 공간에서 오디오북낭독연구회와 전문 배우의 릴레이 낭독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고.
또한 이 작품은 문학과 미술을 결합한 메타픽션으로 소설의 가능성을 확장한 작업이라 볼 수 있다. 텍스트가 영상이라는 시각 매체로 전시되고 이를 관객이 관람하면서 다시 텍스트로 받아들이기 때문. 소설을 읽다 보면 집중력이 흐려져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거나 봐도 머릿속에 박히지 않을 때가 누구나 한 번쯤 있지 않나. 타이핑하는 것처럼 한 글자씩 드러나는 영상을 보면서 글자를 놓칠까 봐 분주히 따라 읽게 되었고, 집중하다 보니 서서 보는 것도 편치 않아 바닥에 앉아서 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 자신도 모르게 낮은 곳으로 향하고 있던 걸지도.
이 소설의 가장 재미있었던 점은 오로지 작가의 시선만 담기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소설인 만큼 이해관계자들의 의견과 소설에 나오는 실존 인물의 피드백이 녹아들어 있다는 부분. 어느 곳이든 외부와 내부의 시선 차이는 존재하고 그 격차를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터전과 뿌리의 관계성
현우민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 될지도 모른다.” 이주와 인간의 이동에 대해 다루는 현우민 작가는 제주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조부모의 이야기가 담긴 <돌-아-가>(2010), 그다음으로 재일 한국인 2세 부모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殘像旅行 잔상 여행>(2024)을 공개했다.
일본의 거리를 찍은 영상과 인터뷰 방식으로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는데, 화면의 자막은 영어와 일본어로 되어 있어서 청각적 요소에 의존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신체가 자유롭다고 해도 언어가 주는 답답함이란 혼란을 야기하는 정신적 압박과 다를 것 없으니. 우스갯소리로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어도 능숙하지 못해 사실상 0개 국어’라는 농담을 사람들이 던지곤 하는데, 이 작품을 대면했을 때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졌다. 특히 재일 한국인 3세일지라도 한국말은 물론 한국 자체가 멀게 다가왔던 작가의 입장과 비슷하다면 말이다. 작가에게 한국은 그저 여행가는 곳 정도였고, 실생활에선 부모님이 싸우실 때를 제외하곤 한국어를 거의 들어보질 못했다고.
"태양과 같은 찬란한 빛은 아니더라도,
호롱불 같이 작은 빛으로
사회의 어두운 한구석을 밝히는 사람이 되자."
- 동교 김희수(1924~2012)
저마다 자기만의 드라마를 쓰며 살아간다. 우리는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며,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지난 삶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했기에 간과할 수 없는 사실. 공감이라는 작은 빛이 연대라는 강한 빛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기이하다. 시대의 변이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감한 순간이라 더욱 그렇다.
더디고 미약할지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길을 걸어본다면 놀랍게도 세상은 달리 보인다. 혼자일지도 모르지만, 빛을 내겠다는 용기는 반딧불처럼 또 다른 빛을 밝힌다. 그렇게 모인 작은 빛들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꿈꾸게 하고, 정서적 위안을 주는 밝은 달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칠흑 같은 어둠 속, 스스로 빛을 내기에 아름다운 반딧불의 향연이 펼쳐지길 바라며 잠을 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