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뉴웨이브 2024 곽재혁 피리
제법 선선해진 공기가 반가운 8월의 마지막 목요일, 곽재혁의 피리로 하반기 수림뉴웨이브 시작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한국 전통음악의 현주소인 수림뉴웨이브의 올해 주제는 '독파獨波'. 자기만의 흐름으로 음악 세계를 써내려가는 예술가 20인의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다뤄나갈 예정이라고.
여기서 수림뉴웨이브란? 북촌뮤직페스테벌을 시작으로 벌써 13년째 이어지고 있는 수림문화재단의 전통예술 공연제다. 전통 창작 예술가를 발굴해 그들의 창작실험을 지원하고, 대중에게는 새로운 우리 음악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 매 공연 1명의 연주를 주목하며, 수림뉴웨이브를 꾸려가는 재단 직원과 추천위원들이 관객을 대표해 곡과 곡의 사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형식. 이 공연에 좋은 이유 중 하나에는 있는 그대로의 가공되지 않은 소리를 들려준다는 점도 있다.
익숙한 기억대로 김희수아트센터 SPACE 1에 들어서는 순간 살짝 당황했다. 기존의 무대를 바라보는 전형적 좌석 형태가 아니라 공연이 펼쳐지는 공간을 둘러싸듯 ‘ㄷ’자 형태로 좌석이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 몇번 이곳을 찾아왔다고 그 사이 익숙해져버린 공연장엔 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디에 앉아야 공연을 원활히 즐길 수 있을지 자리를 옮길까 말까 갈팡질팡 했던 건 나만 그런 게 아니겠지.
적막이 감도는 공연장, 푸른 조명을 받은 그의 손아귀엔 잘그락대는 피리들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주법부터도 원초적이었던 <태어난 소리>로 공연의 운을 띄우며 초연을 올렸다. 원래는 물에 적신 리드를 사용해야 하지만 이 곡에서는 곧바로 리드를 사용해 입에서 적셔진 상태로 연주했다. 즉흥은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는데, 여름의 시작인 소만을 8월의 끝에 표현하며 다시금 생동하는 기분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분해된 소리들로 한껏 해체적인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곽재혁 연주가가 학생시절 가장 많이 연주했다는 <수연장지곡>, 대규모합주여야 그 맛을 여실히 느끼기 좋다지만 이번 공연에선 특별하게도 그의 독주로 선보여졌다. 기본기에 충실해야 하기에 그만큼 힘든 곡인데, 연주하는 내내 힘에 부치지만 기어코 끝을 보고야 마는 집념과 인내심에 경탄할 수 밖에 없었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이마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에 몰입하며 기운을 쏟아붓는 그의 모습이 열정을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가 피리를 사랑하게 된 계기라는 <상령산풀이>까지 그의 인생에 변곡점같은 곡들이라고.
곽재혁 연주가의 뒤로 설치된 장치들이 궁금했는데 앞서 수림문화재단 《작은빛》 전시에서 알게된 서성협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 요소가 합쳐진 <소리병풍>과 <유사병풍>, 알알이 자리한 전구들까지 공연이 시작되면 어떤 효과를 줄지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코노스타시스 형태의 병풍을 모티브로 한 예술 작품인 <유사병풍>. 여기서 이코노스타시스란 동방 정교회의 제단과 신자석을 구분하는 칸막이인데, 보통 성화나 성경 이야기가 담긴 상징이 장식된다고. 서성협 작가의 <유사병풍>은 종교적 서사 대신 동양화나 동판화 등 비종교적 이미지를 사용한 콜라주 형태로 구성했다.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탈피해 다양한 문화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곡 <太平小굿>도 이번 공연에서 초연이었으며, 특별히 타악 연주가 김성훈이 함께 자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고깔과 백의를 쓰고 그동안 쌓인 사리를 털어내듯 움직이는 모습이란. 그저 숨을 죽이고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열정적으로 소리를 쌓아가다 절정에 치닫고 나면 이내 소리가 멎는다. 걸친 것들을 고이 벗어두고 그는 다시 본래의 자리를 찾아간다. 어쩌면 무아지경의 세계로 잠시 접속했다 현실로 돌아온 것 같으면서도 이번 공연의 제목인 변명이 퍼포먼스로 드러난 순간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삶이라는 고단한 여정을 거쳐 그가 도착한 고요의 끝에 무엇이 있을진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고 현재를 웃음으로 즐기며, 삶이 주는 기쁨을 받아들였다는 것 말이다.
그가 지금껏 음악을 할 수 있던 이유로 뚝심보다는 다양한 이름으로 바꾸어가며 그의 길을 걸어왔던 점이 크게 자리한다고 언급했다. 거창한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도 지금 그가 가진 꿈은 사람들이 쉽게 들을 수 있는 공감이 될만한 짧은 음악을 전개하고 싶다는 것. 이는 단순함을 뜻하지 않는다.
수림문화재단 예술사업부 윤정혜 팀장과 나누는 담소에서 곽재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갈 수 있어 좋았다. 공연 도중, 실수없이 곡을 끝마치고 싶다는 소감에 이어 자신이 혹여나 실수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관객들이 누리는 특권이라 말하는 부분에서 그의 재치를 느낄 수 있었다. 낯선 감정이 찾아들 때도 있고 누군가가 쓴 언어표현에 마음이 동할 때가 있어 평소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영감을 얻는다고. 앞으로 자신의 이름이 변형될 것인지, 변화할 것인지 본인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면서 공연은 끝이 났다.
우리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 여러번 이름을 바꾸고 바꾸며 스스로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각자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뚝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포기하는 법을 더 쉽게 배우게 되는데, 정석적인 길을 고집하다 지치기 보다는 그저 포기가 아닌 우회를 택한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쓰여지지 않을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