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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wall Mar 05. 2024

르꼬르뷔지에의 5대 원칙과 모듈러

2-1 현대실내건축론 레포트

르꼬르 뷔지(1887-1965). 많이 들어본 건축가이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스위스 출생으로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아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입체파(큐비즘) , 추상회화를 창조한 새로운 예술 속에서 순수주의(퓨리즘)를 주장했다. 르꼬르뷔지에는 평생 동안 예술가로서 화가로서의 역할을 중시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려고 애썼다. 오랜 시간이어온 자신의 회화창작활동에 관하여 ‘만일 내 건축작품에 어떤 가치를 인정해 준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숨겨진 노고에 대한 보람이다’라고 1948년 기록되었다. 실제 그의 생활은 회화제작에 몰두하는 아침과 사무실에서의 오후로 나눠져 있다.

유명한 세빌가 35번지 작업장에서는 사촌동생인 피에르 잔느레가 모든 일의 진행을 맡아 세계에서 모인 수습자들을 지휘하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1940년 이후 피에르가 세빌가를 떠난 후로부터는 안드레 보쟌스키가 이어받게 된다.) 전쟁 후 르꼬르뷔지에의 제자인 요 시사카가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건축가의 작업장은 모두 우리처럼 어수산하게 제도판이 널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조금 다르다 작업장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큰 책이 널려져 있다. 화집종류의 도서인 것 같은 것이 금속으로 만든 선반에 놓여 있어 아래가 훤히 트여 있다. …(중략) 그벽 사이에는 붉은색의 강한 큐비스트 풍의 작품 두 점을 액자에 넣어 한 점은 화판틀에 놓여 있다. 책장 바로뒤에는 30호 정도의 그림이 300점 정도 빽빽이 걸려 있었다….(중략)”  <르 꼬르뷔지에와 나>에서

앞의 내용으로 보아 그만의 작업장 풍경이 상상된다. 르꼬르 뷔지에의 거처도 화가로서 작업장을 중심으로 생활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의 모듈러 (Modulor)

측정하는 것, 비례 분할하는 것, 조화시키는 것. 높이, 폭, 깊이, 형태, 내용의 가구, 설비, 수납 그리고 전체는 측정된다. 즉 조화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일정의 비례를 도입하는 것, 이 통일은 인체척도와 그 주위와의 조화된 관계로부터 생겨난다. 수학, 우주를 지배한다. 그것은 특히 인체척도의 안에 명시되어 있어서 황금비라고 하는 마음과 눈의 쾌감을 생겨나게 하고, 끝없는 일련의 수를 형성하는 사물로 연결된다. 아인슈타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것은 비례에 관한 언어로서 악을 복잡하게 하고 선을 간단하게 그렸다>라고  

-르꼬르뷔지에-


그는 1900년대부터 1907년대까지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연을 공부했다. 그로 인해 르꼬르뷔지에는 자연은 질서와 법칙, 끝없는 통일과 분산, 미묘의 극치, 조화와 힘이란 교훈을 어린 나이(15~20세)에 얻게 된다. 19세가 되자, 그는 첨탑이 가득한 예술작품들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그 후는 파리에서 중세의 교훈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엄격하면서도 용감한 체계였으며 도시성과 사회성을 갖춘 위대한 질서였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연결시키는 규칙은 무엇인가?

23세가 되었을 때 그는 마음속에 한 가지 난제가 떠올랐다. 그는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직각이 구도를 지배한다. 따라서 직각의 위치가 전체구도를 통제한다.”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쳐진 카드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지만 전에 이루어진 동일한 결과에는 미술작품의 구도가 몇 가지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생각하며 자신의 확신을 믿지 못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조절선을 다룬 오귀스트 슈화지의 ‘건축의 역사’라는 한 권의 책이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게 된다. 그 후 1918년 르꼬르뷔지에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든 작품 들은 기하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두 가지 수학적인 요소가 적용되었는데 바로 그것은 직각의 위치와 황금분할이다. 1922년이 되자 6년 만에 <레스프리 누보>에서 준비해 오던 근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여행을 다니는 동안 모든 조화로운 건축물에서 마루와 천장사이의 거리가 대략 2.10미터~2.20미터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터키, 그리스, 스위스 등 등지의 가옥, 프랑스의 고딕의 오래된 목조가옥 등 루이 15세로부터 왕정복고에 이르는 기간 동안 변천된 파리의 상점들은 다락의 높이가 2.20미터와 동일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뒤에 나오는 팔을 올린 사람의 키로서 신체의 규모에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여행을 통해 알게 된 매력적인 치수를 계기로 훗날 모듈러를 만들게 되었고 르꼬르뷔지에는 그것을 도입하고자 했다. 프랑스에서 건축에 종사하던 1925년부터 1933년 사이의 생산적인 시절을 거치며 그는 신체의 비례 체계에 맞는 건축을 하고 싶은 욕망과 충동 그리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며 자신의 아뜰리에 벽의 높이를 4미터로 정했다. 그 안에서는 진정한 측정 방법으로써 자신을 만나며 키를 잴 수 있었다. 또 휴식과 앉아있기, 걷기 따위의 공간을 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실험을 통해 미터법은 십진법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르꼬르뷔지에는 미터법을 추상적인 숫자이며 건축에 있어서도 공간의 측정을 한정할 능력이 없다 평가했다. 그 이유로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숫자에 복종하기 시작하여 다른 편리한 측정 방법들에게까지 미터법을 적용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즉 르꼬르뷔지에는 미터법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게을리하며 무지하게 만드는 위험한 도구로 생각을 한 것 같다. 그중 <AFNOR>는 독일의 점령 하에 국가의 재건을 도울 목적을 가지고 설립되었다. 산업가 공학자, 건축가 집단이 특히 건축에 관련된 모든 것의 표준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AFNOR의 제1차 표준화된 규격품이 발표되던 날, 르꼬르뷔지에는 <신체의 비례 체계에 따른 조화로운 측정 방법>이라는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이게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는 세계 2차 대전으로 프랑스가 점령당하자 작업실은 폐쇄되었고 4년 동안 작업보다 본격적으로 이론탐구에 몰두했는데 ASCORAL의 협회를 대신해 감시의 눈을 피하며 은밀한 장소에서 매달 두 번씩 모임을 가지며 연구를 계속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그는 모듈러를 발명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과 자신의 의견을 이러하게 밝혔다.

AFFNOR은 건설에 관련된 모든 물품을 표준화하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려는 방법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어 단순한 수리적 계산만 가지고는 건축가와 기술자, 제조업자가 사용하는 방법이나 관습의 단면도 밖에 얻는 게 없다. 그 방법은 임의적이고 빈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예로 들어 줄기와 가지, 잎과 잎맥을 관찰한다면 이들 사이에 수학적인 연결관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토대로 벽에 비례의 격자를 세우는 것이다. 그 격자는 작업장에 규칙이 되고 조화와 비례가 끝없는 연속성을 넓혀주는 표준이 되며, 자신들의 작업을 위한 계산 방법들을 선택해야 할 때 비례격자를 참조하게 되는 것이다. 작업장의 격자. 그리고 그 내부에 설치된 인간에게 적합한 격자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키와 수학을 조화시킬 수 있는 측정치들을 얻을 수 있다고 르꼬르뷔지에는 확신했다.

그렇게 연구를 지속한 결과, 팔을 올린 사람 한 명을 내부에 담은 두 정사각형 속에 '직각의 위치'를 기준으로 제3의 정사각형을 끼워 넣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냈다. 그의 비례 격자는 유용한 측정치들을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건물의 터에 자리를 잡게 되며, 이로써 방과 문, 찬장, 창문 따위의 계획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대량생산의 무한한 조합으로 변형되고 미리 조립된 건물의 요소를 만들며 무난히 결합될 수 있다.

그에 대한 정의를 찾던 도중 전쟁으로 인해 먼지 투성이와 전화나 난방 시설도 갖추지 않은 작업실에서 촛불을 벗 삼아 연구했다. 그러던 중 1944년 파리는 해방을 맞은 1년 후 1945년 3월 30일부터 격자에 간한 작업을 재개했다.

그는 우선 위의 사진과 같이 인체 모형의 키를 배꼽에서 황금비를 따라 둘로 나누었으며, 나눈 구간들을 황금비에 따라 무릎과 목에서 세부적으로 다시 나누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황금비율을 모듈러 체계에 활용하였다. 이러한 황금비 이외에도 인체측정학, 피보나치 수와 같이 두 가지 단위를 시스템의 토대로 사용했다. (르꼬르뷔지에는 기하학적인 조합에 인체의 값을 대입해서 조사를 할 때에 1.75m가 되는 사람의 키를 채택해 조사했다고 한다. 이 조사에 대한 결과물은 위의 사진이다.)

그는 이러한 결과물을 특허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특허국의 책임자, 담당자에게 설명을 해야 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간단 고도 신속한 설명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로꼬르뷔지에는 자신이 찾아낸 비례격자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고 이해가 안 된다면 설명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설명이 지나고 그의 예상과 같이 기술자는 아직 그의 설명이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세 번째 설명이 끝날 무렵 드디어 그의 노력이 빛이 발하는 순간이었다. 기술자는 그가 나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특허 담당자로서 보낸 제일생을 통틀어서 당신과 함께 보낸 이 시간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약 1년 후 르꼬르뷔지에는 조립주택건설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자신의 발명품을 팔기 위해 자신의 이권을 양도했다. 그렇게 그의 대리인은 특허권의 범위를 유럽과 미주의 많은 국가들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그의 모듈러를 보곤 특허국장은 미터와 피트 인치의 체계에 원만한 숫자나 afmor의 숫자에 맞지 않다며 의견을 토로했다. 그에 맞서 르꼬르뷔지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발명품으로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며 지 격자와 함께 평화롭게 작업만 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단지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제로 적용해 보고 직접 내손과 눈으로 개선시키고 발전시키고 싶은 것뿐, 그러니까 상업적 조직체도, 명예도 원치 않다. 내 발명의 본질은 바로 그런 것이다. 건축가와 실제 작업자들이 이 측정기구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현제 세력을 떨치고 있는 두 가지 체계 미터와 피트 인치의 적대관계로 인하여 대립과 장애가 허물어지고, 우리 측정체계가 양자를 통합시키게 될지는 그 누가 알겠는가? 난 결코 통행세를 거두는 관리로 남고 싶지 않다”

그의 말로 통해 모듈러의 발명이유는 단순히 금전적인 욕구와 명예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닌, 당시 대립하고 혼동하고 있던 측정체계를 통일하고자 했던 것인 것 같다.

르꼬르뷔지에가 말하는 '모듈러'

인간의 신체와 수학에 근거한 측정기구이다. 팔을 들어 올린 사람은 그가 차지한 공간의결정점들이며 발 배꼽 머리 올린 팔의 손가락 끝 사이로 세 개의 간격을 제공하는데 이 간격들은 피보나치의 계열이라 불리는 황금분할을 보여준다. 모듈러를 사용해서 얻어지는 조합들은 무한한 것으로 입증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모듈러가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른 측정법들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숫자들을 다듬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배꼽에 의한 1,080mm는 인치법과 타협할 수없다는 것.

하지만 이 것은 1.75미터의 신장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만든 측정치이므로 다른 표준치를 적용해 보며 모듈러는 미터를 피트와 인치로 자동 변환을 시켰다. 이로써 앞서 말한 요구가 해결이 되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이 체계를 설계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예로는 가르슈에 설계한 빌라 슈타인(Villa Stein)을 예로 들 수 있다. 주택의 직사각형 평면, 입면, 그리고 내부 구조의 비례는 거의 황금비의 사각형과 비슷하다. 그 외에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ed d' Habitation) 등이 있다. 또 그가 만든 모듈러를 다른 건축가가 이용해 만든 건물로는 대표적으로 한국에선 코르뷔지에의 제자이기도 했던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서강대학교 본관건물이 있다.


그는 모듈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건축적인 빛나는 통일체 여기에서는 황금비가 지배하고 조화된 틀을 만든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프리즘을 제공하고 인간적인 척도에 의해서 비례가 맞춰지며 보기 좋게 정리되고 아래에서 위까지 그 전반적인 모습에 변화와 환상을 허용한다...(중략) 때문에 우리들의 감각에 위화감을 조금도 주지 않는다.”

세계산업의 생산품들의 치수를 다루는 것으로 무한히 조합할 수 있는 모듈러 modulor를 제안했다. 르꼬르뷔지에는 피트 인치와 미터의 체계 대신 모듈러가 쓰일 것이라고 예견하였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현대에는 모듈러가 널리 이용되고 있지 않지만, 그가 일생을 받쳐 연구해 낸 과정과 결과들은 여전히 가치가 높음은 분명하다.


근대건축의 5대 원칙

평면이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강한 제약이 있기 때문으로 대지의 이용에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 건축불허가지역, 오래된 나무의 존중, 높이제한 게다가 집은 북향으로 집의 반대편에서 빛을 발산한다. 이 난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주택도 궁전이 된다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훌륭한 대지 넓은 목초지와 과수원이 둥근언덕을 형성하고 커다란 나무로 둘러 싸인 토지 이 집은 정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약간 높이 지어져서 사방의 조망이 있어야만 한다. 거주층도 공중정원도 필로티에 의해서 높여져서 지평선을 바라보도록 되어야만 한다.

필로티아래에는 자동차의 교통, 가사용실, 차고, 현관은 중심축에 필로티의 아래에 있어서 완만한 경사로 자신도 모르게 위의 층에 도달하게 된다. 태양에 대한 방위 관계는 조망과는 반대이다. 따라서 햇빛을 받는 곳은 공중정원의 단상의 위에서 구했다. 가장 위는 일광욕장에 곡면을 사용하여 바람에 견디도록 하였고, 건축적으로 풍부한 요소를 보여준다. 건물의 본체는 비슷한 벽면이 사면을 둘러싸고 띠모양으로 열린다. 그곳에 옆으로 긴 창의 한 종류만이 존재한다.

-르꼬르뷔지에-


이 생각에서 구상된 것이 골조로써 주택의 공간과 기계와의 완전히 독립시킨 것이다. 바닥과 계단만의 골조였다. 그는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근대 건축의 5원칙을 펼쳐 놓게 되는데, 5대 원칙의 시작은 도미노(Dom-Inno') 시스템으로 불리는 단순한 구조에서 시작되었다. 이 구조는 사진처럼 최소한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서 지지하는 단순한 구조이다. 벽체와 지붕은 분리하여 모든 하중을 기둥이 지탱하되, 내부의 입면이나 평면은 자유롭게 구성하게 된다는 점이 이 도미노구조의 핵심이다. 꼬르뷔지에의 5대 원칙은 건축가마다의 공법과 미의 기준이 통일되지 못하였던 과거의 건축을 선진화되고 정형화된 건축으로 옮겨 놓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기여했다고 평 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형태, 시적정서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정물화 명작을 남겼고, 잡지 "레스프리누보"와 그의 저서 "건축을 향하여"를 통해 1920년대에 걸쳐 확립한 개념인 건축의 다섯 가지 요소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1. 필로티

철근 콘크리트 기둥인 필로티(pilotis)로 무게를 지탱하고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 올려 지표면(1층)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만든다. 1920년 이전에 이미 르꼬르뷔지에는 지면으로부터 4~5m 위에 조립한 격자를 얹은 도시계획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후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생각의 결과물이다. 1929년 작품 <사보아 주택>과 1953년 <낭트레제의 유니테 따비 타시어>에서 이 같은 구상을 보여준다.

2. 자유로운 평면

지지벽이 필요 없이 바닥 공간이 방들로 자유롭게 배열된 "열린 평면"을 만든다. 지금까지 건축 평면은 구조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유연성을 찾게 된다. 직선과 곡선의 벽체에 의해 내부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담한 내외부 공간의 관계가 만들어졌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이러한 평면을 유기적이며 신비로운 것으로 해석한 반면 르꼬르뷔지에는 기술적이며 합리적으로 해석했다.


3. 자유로운 입면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도록 구조 기능을 갖지 않는 벽체로 "자유로운 입면"(façade)을 만든다. 르꼬르뷔지에의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입체파와 데 스틸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옥상정원

건물이 서기 전에 있던 녹지를 대체하기 위해 옥상 위에 "옥상 정원"을 만든다.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차단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평지붕의 기능적인 용도로 전환되고 유럽각지의 사무동과 회의동 옥상에 적용되었다. "빛 아래 집합된 입체의 교묘하고도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고간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다.


5. 수평띠창

훨씬 채광효과가 좋은 길고 낮은 "띠 유리창"을 사용한다. 이러한 수평 개구부의 특성은 공간의 수평층을 강조하며 파노라마적 광경을 넓히는 효과를 보인다. 넓은 수평창으로 인해 모든 실내공간을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와는 다른 과감한 내외부 공간의 관계가 가능해진다. 시트로 앙 주택, 바이센호프 주택에서 이 같은 창들을 필로티 위에 얹혀 등장하게 되며 국제 연맹본부 계획안에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의 긴 창이 나타나기도 했다.

필로티는 예전부터 사용되던 벽식구조처럼 벽면으로 무게를 전달하는 게 아닌 기둥으로 무게를 전달함으로써 시야를 막지 않아 흡사 공중에 매스가 떠있는 형태의 느낌을 가진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필로티라 표현한다. 위의 새로운 구조인 기둥으로 무게를 전달하는 상태에서 벽면 구성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자유로운 평면을 구성할 수 있다는 이론 라멘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평면과 입면이 가능하다. 또 그로 인해 수평으로 길게 벽을 뚫어 창을 구성하여도(수평띠창) 크게 건물에 큰 문제가 없기에 가능하다.

이후 모더니즘의 황금기가 끝났다지만 르꼬르뷔지에의 영향은 죽지 않았다. <빛나는 도시>의 구상이나 알제의 도시계획(1930-1942)등 르꼬르뷔지에만의 상상력은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건축에 있어서도 앞서 말한 마르세이유의 <유니테 다비따시옹(1945-1952)> 롱샹예배당(1950-1955) 인도의 샹디갈계획(1950) 등 대담하고 강한 조형미를 말년까지 보여주었다.




*참고자료

<르 꼬르뷔제_도시 속의 자연, 영혼의 건축> 박영권

<모듈러 : 르 꼬르뷔제의 비례론> 르 꼬르뷔제 지음 박경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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