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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병가일지_일시적 안정

by 딜피

병가를 내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병가 동안 뭘 해야하지.

하고 싶은건 많았다 다이어트도 해야할 것 같고, 여행도 가야할 것 같고,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따거나, 이직에 성공하거나.


근데 그런 미션들에 항상 조바심을 내면서 이루지 못했을때 실패감을 느끼면서 그런 누적치로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버거워했던 것 아닌가.


일단 아무 생각없이 회사를 안 가는 것에 집중하자 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아직까지도 불쑥불쑥 뭐라도 해야하는 것 아닐까, 토익 공부라도 해야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긴 한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방학을 어떻게 지내는지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기록마저 미루고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4주차에서야 시작을 하게 되었지만.


첫 주에는 여전히 서울에 있으면서 치과도 가고 필테도 가고 그냥 주말의 연장선상 같았다.

그리고 그 주 목요일부터 10일간 대전 본가에 머무르게 되었다.

부모님이랑 사는 일은 영 불편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제 나도 눈치 많이 보고,

또 부모님이 바빠서 계속 밖에 나가계시니 눈치껏 놀면서 잠도 일찍 자고 밥도 챙겨주시고 마음이 편하더라.


운전 연습도 하고 부모님이랑 함께 야구 경기도 보고,

마침 병가 시작 즈음부터 야구에 빠져서 매일 야구 경기 보면서 얘기하고 밥도 잘 먹으니

사실 그만둔 직후 5-6일은 직장 생각을 안할 수는 없었지만

대전에 있으면서 많이 직장 생각을 안하게 되었다.


일단 알람이 안오고, 전화를 다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많이 도움이 되었다.

정말 직무를 바꿔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기도 했다.

이렇게 연락포비아가 생겨버렸으니..

아니면 다시 복귀하게 되면 연락을 받는 정도나 프로토콜 같은 나만의 원칙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에 잠시 일주일을 머무르게 되었다.

일정도 있고 병원도 가야해서.

근데 웬걸, 정말 예전 버릇대로 다시 돌아가서 모든 끼니를 배달시켜먹고, 저녁때면 폭음을 시작했고,

집밖으로 나오기를 너무나도 힘들어하게 됐다.

좁은 집이라 밥먹는 곳과 뭘 펴놓고 작업하는 공간이 같아야했고,

요리하기도 넓지 않고, 결론적으로 1을 하기 위한 1의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에서 1,2,3,그 이상을 해야하니 1을 하고나서 2를 위해 치워야하고

3을 위해 2를 치워야하는 그 스트레스가 무의식중에 나의 행동반경을 제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자리에 앉아서 기분이 빠른 시간 내에 좋아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

술마시는 것과 유튜브 보기 뿐. 이었던 듯 하다.


일정이 끝나면 바로 다시 대전에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전과 똑같은 서울에서의 일주일이 지났다.


이 시기에 타이밍 좋게 또 맞아 떨어진 건, 본가에 부모님이 잠시 집을 비우실 일이 있었고, 또 차를 놓고 가셔서 이게 내 차지가 됐다.


지난 여름, 또 하나 나를 힘들게 하고 방에만 쳐박혀 있게 만든건 더위였다.

너무나 무더운 날씨에 출근만 하면 진이 빠졌고, 그 더운 날씨에 퇴근만 하면 정말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지치고 내리쬐는 더위에 나아질 거란 희망도 없는 회사에 가야한다는게 너무 절망적이었고,

진이 빠지고, 몸에 기력이 없어져서 그런가 방에만 도착하면 너무나도 우울해지고 몸과 마음이 바닥에,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꼭 늪에 한없이 쳐박혀 오도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몸마저.


그때 정말 우울감이 더 심해졌고 진짜 꼭 차를 사든지 회사를 그만둬야지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폭음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정말 밖을 나가기가 싫었고, 살기 위해 밖에 나가야만 하는 내 처지가 싫어서.


그러던 여름이 다시 다가왔고, 나는 출근을 안해도 되고 (부모님 차지만) 차도 생겼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나를 초라하게, 지치게, 절망적이게, 정신 나가게 만드는 더위에서 잠시라도 도망칠수 있는건 다행이었다.


어찌됐든 일단 서울의 터전을 냅두고 다시 대전에 온 나는 점점 정신을 차려가고 있다.

대전에 오자마자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다녀왔다.

의외로 똑같은 체력의 나인데, 더 넓은 집과 더 넓은 반경을 다니는게 버겁지가 않게 되었다.

좁은 집보다 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살림을 하고 있고, 매일 설거지를 하고 요리를 하고 물을 끓여마시며 청소를 한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마트가 있고, 편의점이 있고, 올리브영이 있고, 헬스장이 있는 서울에선 꼼짝않고 방에 있던 내가 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마트를 자주 가고, 수영장에도 가고, 예쁜 카페를 찾아가고.

일단 문턱이 낮아지니 더 자주 밖에 나가고, 해가 진 뒤에는 요가를 하러 가거나 산책을 하러 간다.

다녀와서는 야구 중계를 보고 야구 관련 유튜브 순회를 다 하고나서 잠에 든다.


술을 아예 끊은건 아니지만 술 생각이 덜 나서 마시는 빈도가 줄고,

마신다고 해도 와인 반병은 거뜬히 마시던 내가 한두잔이면 되었다는 만족감이 든다.


일요일에 도착한 대전에서, 첫 주에 부산스럽게 차를 끌고 마트에 다녀오고, 요가를 가고, 요리를 해먹으면서

3-4일이 지난 뒤인 지난 주 수요일에는 정말 '행복하다'라는 감정이 차올랐다.

이렇게 사소하게, 8-9시에는 일어나서 유튜브나 책을 보다가 낮에는 차를 끌고 수영이나 마트를 가고, 요리해먹고 요가를 다녀오는 그 길에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속에서 편안함이 차올랐다.


좁은 집과 좁은 길거리가 문제였던 걸까. 계속 회사와 신물나는 연락에 쫓기는 시간이 문제였던 걸까.

이렇게 사소한 것들만으로 마음이 차오르면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극단까지 내몰렸던 걸까 나는.

혼자서 곱씹는 이 안온하고 편안한 시간이 행복하다.

많은 생각에 시달리며 항상 괴로웠었는데 생각이 많이 덜어졌고, 일단 미래의 불안함은 미래의 나에게로 미루고 있다. 지금의 어렵게 찾은 행복을 지금의 내가 즐겨야지. 불안해 하면서 그 감정으로 또 나를 괴롭히면 미래에도 또 후회할거같다. 그때의 나라도 행복하게 냅둘걸 하고.


일단 직무는 맞지 않는 다는 결론이 났고, 직무를 바꾸기 위해 뭐든 해봐야지 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무언가를 바꾸고 끊어내는게 정말 힘든일인 것을 알고 있지만.


또 한번, 미래의 나에게 미룬다. 어차피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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