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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Apr 12. 2022

안 뻔해 경주, 안 지겨워 벚꽃

식상했던 관광지를 달리 보게 된 사연


“벚꽃이 그렇게도 예쁘디 바보들아”

벚꽃 시즌마다 저작권 수익을 팍팍 땡기는 장범준보드는 십센티의 이 노래 가사에 공감하는 편이었다. 꽃에 흥미가 없다기보다는 사람 몰리는 곳이 질색이었다. 여의도 윤중로? 사람에 깔려 죽을 일 있어? 진해 군항제? 거기 갈 바엔 일본을.

구태여 벚꽃을 보겠다고 먼 길 떠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던 내가, 바보 대열에 합류했다. 작년 봄, 벚꽃 시즌에 경주를 여행하면서다.


경주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불국사 다녀온 이라면 대체로 그럴 테다. 수학여행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몇 해 전 경주 기사를 쓴 뒤 쓴 맛을 본 경험도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경주 남산을 중심으로 불교 유산을 취재했다. 문화재 이름 하나 잘못 썼다가 독자 항의를 받았고 팀장에게도 팩트 체크 제대로 안 했다며 호되게 깨졌다. 그 뒤로 경주만 생각하면 의기소침해졌다. 문화재는 왜 이리 많으며, 역사는 왜 그리 깊은가, 경주여. 이후 두어번 경주 출장을 더 다녀왔다. 그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기사를 썼다. 소심하게 쓴 기사가 재밌을 리 만무했다.

도처에 대형 무덤이 있는 경주 시내 풍경. 그 앞을 아무렇지 않게 오토바이가 달리는 모습이 낯설다.

그렇게 재미없고 씁쓸했던 경주를 여행으로 가게 된 건 아내 때문이었다.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더니 ‘봄 경주 여행’이라고 콕 집어 말했다. 벚꽃도 보고 한옥 숙소에도 묵어보고 싶다고. 이렇게 생일 선물이 구체적인데 피할 도리는 없었다. 2021년 3월 말, 4시간여 차를 몰고 남쪽으로 내달았다.

작년엔 봄이 빨랐다. 3월 말 경주는 꽃 천지, 사람 천지였다. 코로나 확산이 심하지 않을 때였는지,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다. 숙소는 황리단길 한복판에 있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황리단길은 주차 지옥이다. 숙소에 주차장이 달려 있지 않아서 좁은 골목에 요령껏 차를 댈 수밖에 없었다. 장거리 운전을 한 뒤 주차 공간 찾다가 진이 다 빠졌다. 대문을 열고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객실에 짐을 풀고 아내에게 말했다. 까칠하게 굴지 않으려 애썼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평을 억누를 순 없었다. “침대 없는 건 이해하는데, 의자도 없네. 화장실이 되게 아담하다. 샤워를 서서 못 하겠어, 하하.” “한옥이니까 그러려니 해. 여기 방 좁은 거 말곤 다 좋을 거야.”


숙소 주인이 추천해준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슴슴한 콩국수 맛이 마음에 들었다. “흠. 주인 분 안목은 있으시군.” 떨어진 당을 보충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통일신라 때 별궁이 있었던(왠지 경주는 이런 설명을 다 넣어야 할 듯한 압박감이..) ‘동궁과 월지’로 밤 산책을 나섰다. 은은한 조명과 달빛이 누각과 벚나무를 비춘 모습이 퍽 낭만적이었다. 경주의 봄은 이런 거였군, 그럴싸하네, 중얼거렸다.


한옥 숙소 객실에서 내다본 마당. 찢어진 창호지를 재미난 그림이 그려진 종이로 덧댔다.

이튿날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깼다. 주인 분이 아침을 먹으라고 부르셨다. 안채 문을 연 순간 ‘우와’ 하고 육성이 터졌다. 업라이트 피아노와 벽난로, 과하지 않은 빈티지 조명과 손수 엮은 패브릭 제품이 어우러진 아담한 거실이 근사했다. 식탁에 2인 상이 차려져 있었다. 버섯 향 은은한 떡국, 직접 만든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는 한눈에 봐도 지극한 정성이 느껴졌다. 물론 맛도 기막혔다. 밥을 들면서 주인 분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책, 빈티지 제품 등 몇몇 취향을 공유할 수 있어 흥미로웠는데 그보다는 순수한 어른의 모습을 마주한 것 자체로 좋은 기운을 얻었다. 산티아고 길을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처음엔 외국인 투숙객을 상대하는 게 겁이 났지만 지금은 주저하지 않고 말을 건다고. 언제가 될지 몰라도 산티아고 길을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아주머니 얼굴에서 아이가 보였다.


여행 취재가 업이다 보니, 남의 여행에 시큰둥할 때가 많았다. 나도 거기 가봤는데, 가봤자 별 거 없는데.. 이런 태도 말이다. 한데 이렇게 맑은 표정으로 여행의 꿈을 말하는 어른을 만나니 내가 너무 찌들어 있었구나 싶었다. 쉽게 싫증내고 뭔가에 금방이 질린다는 건 정신이 노화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머리가 하얘지고 주름이 짙어져도 호기심을 잃지 않고 배우려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청춘처럼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침밥을 먹고나니 운전의 피로와 좁은 방에 대한 불만이 일시에 해소됐다. 이 집이 달리 보였다. 한옥 마당이 그리 넓진 않았는데 설유화, 히어리 등 자잘한 봄꽃이 어우러진 모습이 정겨웠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햇볕을 쐬고 책을 읽으며 여유를 누렸다. 관광객이 골목 가득한 황리단길 한편에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있다니. 갑자기 서울에서도 한옥에 살아보고 싶다는 망상이 들었다.


주인 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벚꽃 감상 포인트와 식당을 추천해 주셨다. 추천 장소의 벚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할 때는 아이처럼 들뜬 표정을 지었다. 머리카락이 반백에 가까운데도, 관광지 경주에 오래 사셨을 텐데도 여전히 계절과 자연에 감탄할 수 있다는 게 부럽고 또 존경스러웠다.

추천해주신 장소는 여느 경주 관광지와 달리 호젓했고 온갖 꽃이 흐드러진 모습이 근사했다. 덕분에 아내와 호사스러운 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서울과 먼, 경주의 봄 하늘은 어찌나 맑은지 분홍 꽃과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모습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주인 분이 알려주신 벚꽃 포인트가 어디냐고요? 사실 꼭꼭 숨겨두고 싶은데 올해 경주시가 대놓고 ‘비밀 명소’라고 공식적으로 홍보해버렸다. 구글에 ‘경주시 벚꽃 비밀 명소’라고 치면 줄줄이 나오니까 참고하시길. 근데 ‘비밀’과 ‘명소’는 형용 모순 아닐지.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올봄 벚꽃 만개한 보문호.

올해도 벚꽃 만개했던 4월 초에 경주를 다녀왔다. 이번엔 출장이었다. 방역 지침이 완화돼서인지 작년보다 경주는 더 복작복작했다. 코로나가 끝난 세상 같았다. 작년에 묵었던 황리단길 한옥 숙소는 영업을 접었다. 주인 분과 문자로 안부를 나누었다. 남산 쪽에서 새 숙소를 준비 중이시라고. 작년에 가봤던 남산 인근 식당과 벚꽃길도 짬을 내 다시 가봤다. 시래기밥은 변함없이 맛있었고 꽃길은 여전히 그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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